10여년 전 ‘명랑 히어로’라는 예능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엔 ‘두 번 살다’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생전 장례식을 통해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예능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강산이 변한 사이 실제로도 생전 장례식을 치르는 사례가 일어나고 있다. 잘 먹고 잘 사는 게 삶의 모토였던 시대는 지났다. 이젠 어떻게 해서 잘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한다.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웰다잉 문화를 살펴봤다. -편집자주-
가상 장례식(사진=mbc)
[뷰어스=남우정 기자] #30대 직장인 이은지 씨의 주민등록증엔 특별한 게 있다. 바로 장기기증 희망자 스티커가 붙어있다. 몇 년 전까진 해외에서 생활을 해왔던 이 씨는 해외에선 사후 장기기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장기 기증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달라졌고 한국에 돌아온 후 장기기증 희망서에 사인을 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몸이라면 마지막이라도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게 이 씨의 생각이다.
# 2017년 옆 나라 일본에서 화제가 된 광고가 있었다. 안자키 사토루라는 대기업 회장이 생전 장례식을 개최한다며 신문에 광고를 게재한 것. 이미 암 선고를 받았던 안자키 사토루는 생전에 도움을 받았던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뜻으로 이 같은 자리를 마련했다. 뜻깊은 행사를 가진 후 약 1년 뒤 안자키 사토루는 생을 마감했다. 10년 전 예능에서나 보던 황당한 설정인줄 알았는데 현실에서도 이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잘 살아보세”
대한민국 한 시대를 표현할 수 있는 한 마디다. 얼마나 잘 살고 싶었으면 노래까지 나왔을까.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은 후엔 건강하게 살아가야 한다며 어디서든 ‘웰빙’(Well being)을 외쳤다. 웰빙 열풍이 지난 간 지 10년, 이제 ‘웰다잉’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웰다잉(Well dying)은 단어의 뜻 그대로 잘 죽는 것을 말한다. 세상과 이별하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웰다잉의 핵심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잘 살아보자고 외치던 이들이 이젠 잘 죽자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달라진 인구 구조에서 온 당연하 결과일지도 모른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인 고령 인구가 712만명, 전체 인구의 14.2%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전년도에 비해 0.6%p가 증가했다. 고령 인구 중에선 1인 가구도 증가했다. 작년 전국 1인 가구수는 561만 8677개로 전체 인구의 28.6%, 역대 최고치였다. 그 중에서 60대 1인 가구수는 1년 만에 8만 명이나 늘었다.
많은 인구가 나이가 들면서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의술의 발전으로 생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도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병을 안고 살아가기 보단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크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작년 발표한 ‘2017년 노인인권실태조사’ 에 따르면 응답자의 83.1%가 존엄사에 찬성하며 연명치료에 반대 의사를 보였다. 연명치료 대신에 평안하게 임종을 마주할 수 있게 돕는 호스피스 서비스 활성화에도 87.8%가 찬성했다.
노년기(사진=픽사베이)
■ 미리 준비하는 죽음
웰다잉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웰다잉 문화를 지지해주는 시스템들도 마련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2월부터 시행된 연명의료 결정제도, 일명 ‘존엄사법’이다. 환자와 가족들의 동의가 있다면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 임종 과정만 연장하는 의료행위를 거절할 수 있다.
비영리 단체들도 만들어지고 있다. 작년 말엔 웰다잉시민운동 본부가 창립했는데 정재계 인물들이 웰다잉문화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영상축사를 통해서 웰다잉이 필요한 이유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각 지역자치단 등에서 웰다잉 교육을 하고 강사를 양성하는 등 다양한 움직임도 포착됐다.
일상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간단한 방법으론 버킷리스트나 미리 유언장 작성 등이 있다. 죽기 전에 해야 할 버킷리스트 등을 미리 작성하면서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 최근엔 영정사진을 찍거나 임종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체험 시스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죽은 후 장례에 대해서 미리 정리를 해놓을 수도 있다. 사체 처리 방식이나 사후 장기나 조직 기증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여지를 준다. 젊은 층에서 장생전장례식에 대한 인식도 긍정적이다. 취업포탈 커리어가 지난해 직장인 370명을 대상으로 생전 장례식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에 약 70%가 긍정적인 반응을 내놓았다.
웰다잉 문화에 대한 관심이 나오고 있는 현상에 대해 최명기 청담하버드심리센터 연구소장은 “사실 웰다잉의 다른 측면은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내가 원치 않는 삶을 살다가 죽느니 깔끔하게 죽겠다고 하는 것은 원초적으로 보면 자살이다. 하지만 웰다잉 문화를 통해 죽음에 대해 희망을 갖고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웰다잉으로 포장한 것이다. 죽음이 생각 안나면 웰다잉으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죽음을 미리 준비하면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도 봤다. 최명기 소장은 “죽음은 극단적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죽음과 비교하면 가벼워진다. 영원히 살 것 같으니까 고민인 것인데 한번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서 삶의 가치 순서가 바뀌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조환 웰다잉문화연구소장은 웰다잉 문화가 자리를 잡기 위해선 세대간 ‘소통’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노인 인구가 아닌 젊은 층은 이런 문제에 관심이 적지만 접할 기회도 없다. 그런 기회가 만들어져야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며 “젊은 세대도 자살 문제나 사고로, 질병으로 죽을 수 있다. 이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수능을 마친 시기나 신입생 환영회 때가 좋은 기회라고 본다.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픽사베이)
■ 존엄사법, 그 후 1년
긴 시간 논란 속에 있었던 존엄사법이 시행된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14일 보건복지부와 국가생명윤리정책원에 따르면 존업사법이 시행되고 1년 사이 연명의료를 유보 혹은 중단한 환자는 3만 6000여명이다.
그러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을 작성했다가 연명의료를 중단한 환자는 0.8%에 불과했다. 하지만 1년 사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이들도 11만명을 넘어섰다.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존엄사법이 시행된 후 시스템에 대한 문제도 여러 차례 제기됐었다. 연명의료결정에 대한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환자가족 전원의 합의가 필요했다. 모든 직계 혈족의 동의를 받아야 했던 것. 더불어 현실적으로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정하기 위한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설치된 의료기간이 약 5%에 불과하다는 것도 꾸준히 지적되어 왔다. 지난해 자유한국당 주호여 의원은 종합병원, 요양병원 내 임종실 필수 설치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런 현실적 문제를 해소해줄 수 있는 일부 개정안이 지난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3월28일부터 적용된다. 이번 개정안에선 연명치료 중단 결정에서 가족의 조건을 배우자와 1촌 이내 직계 존비속으로 축소시켰다. 4가지 의료행위뿐 외에도 체외생명유지술 등의 시술도 중단할 수 있는 방침, 질환에 관계없이 모든 말기 환자가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했다.
보건복지부 이수연 생명윤리정책과장은 “국민들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등록기관을 추가 지정하고 지정된 등록기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확대하겠다”라며 “의료기관이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하도록 독려하고 지원방안을 마련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김조환 웰다잉문화연구소장은 존엄사법 시행 후 변화에 대해 “존엄사법을 통해서 웰다잉에 대해 알게 되고 있지만 좀 더 많은 홍보가 필요하다”며 “죽음에 대해 쉽게 접근한다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여러 과정을 거치고 사회적으로 생각이 성숙해진다면 웰다잉 문화가 자연스럽게 녹아들 것이다. 어르신들도 웰다잉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교육이나 강의가 좀 더 필요다고 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