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경제는 산업과 금융, 두 개의 큰 바퀴로 굴러간다. 산업 분야에선 이미 삼성전자라는 세계 1등 기업의 DNA를 경험한 바 있다. 하지만 금융 분야는 기초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이 배출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답답하고 초라한 상황이다. ‘금융의 삼성전자’는 대한민국 경제의 오랜 화두이자 숙제다. 뷰어스는 K금융의 유일한 해법으로 꼽히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위한 과제와 한계점, 금융당국과 금융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 신제윤의 진심...해외서 성장동력 찾아야
2013년 10월. 신제윤 당시 금융위원장은 아시아 금융허브 홍콩을 방문, 글로벌 금융회사 아시아태평양 지역 대표들과 오찬을 했다. 신 위원장은 한국 금융산업의 미래 성장동력을 해외에서 찾아야 한다는 신념을 평소 갖고 있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전략이 아닌, 우리나라 상황에 딱 맞는 해외진출 전략을 찾고 싶어 했다. 진심이었다. 당시 오찬에 불러 모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대표들은 글로벌 투자은행, 보험, 자산운용사 등 12명이었다.
신 위원장은 이들에게 한국 금융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 업그레이드 전략 등에 대해 고견을 부탁했다. 참석자들은 IT 경쟁력, 우수 인력 등 한국의 강점을 살린 체계적 해외진출 전략을 수립하는 것과 함께 진출 초기 일시적인 손실을 받아들이는 경영진과 당국의 노력을 거듭 강조했다는 전언이다. 치밀한 전략을 세워 장기적이고 단계적으로 시장에 접근하되, 실패가 용인되는 문화를 조성해 다양한 경험이 금융계 내부적으로 축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시 해외에서 이 같은 조언이 나온 것은 국내의 답답한 상황과 관련이 깊다. 외환위기(1997년)가 어느 정도 극복된 2000년대 초 구조조정을 이겨낸 몇몇 시중은행들이 해외진출을 적극 모색했다. 조흥은행을 합병한 신한은행이 2006년 인도로 진출했다. 하나은행은 2007년 인도네시아의 소규모 은행인 비마은행을 인수했다. KB국민은행은 2008년 카자흐스탄의 센터크레디트은행(BCC) 지분 41.9%를 8억5100만 달러에 사들였다. KB의 경우 한국 시중은행이 중앙아시아에 진출한 첫 사례였다.
■ 2008년 금융위기 후폭풍...타산지석 KB은행
하지만 2008년 10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신생 독립국이었던 카자흐스탄의 경제가 흔들리면서 BCC의 채권도 급속히 부실해졌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2009년 말 금융감독원이 BCC 투자 건에 대해 고강도 조사에 나섰다. 투자 집행 불과 2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노무현 정부 말기 추진됐던 해외진출 투자가 이명박 정부 들어 책임 추궁의 주요 타깃이 돼 버렸다.
파장은 컸다. 만장일치로 KB금융지주 회장에 추대됐던 강정원 KB국민은행장은 사퇴를 발표해야 했다. 당시 KB금융지주 회장 자리는 공석이었다. 황영기 초대 회장이 우리은행 은행장 시절 회사에 대규모 손실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금융당국의 징계를 받아 전격 사퇴했기 때문이다. 리딩뱅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한국 최대의 금융회사에서 투자 실패를 이유로 연달아 수장이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 겉으로는 자진 사퇴였으나 외부 압력에 의한 사실상 해고였다.
당시 KB금융 이사회는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강하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무소불위 권력 앞에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금융감독원의 고강도 조사는 사실상 사외이사들을 대상으로 했고, 검찰은 강정원 행장에 대해 내사까지 벌였다. 우리은행에 처음으로 연간 순익 1등을 안겼던 황영기 회장은 2008년 금융위기라는 예상치 못했던 위기를 겪으며 한 순간 ‘죄인’이 됐다.
한국에서 벌어진 이 같은 상황을 해외에서도 모를 리 없었다. 정권이 바뀌고 금융당국 수장이 해외에 나가 ‘글로벌 전략’을 물어보자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라는 답을 들은 이유다.
실제로 한국 대형 은행들의 도전 정신이 꺾인 것은 이 무렵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고심 끝에 내린 투자 결정이 실패로 귀결되는 순간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다른 금융회사들은 똑똑히 봤다. 그런 면에서 KB금융은 타산지석이 됐다. 미운털이 박힌 KB금융은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2대 회장), 임영록 전 재정경제부 차관(3대 회장)을 거친 뒤에야 내부 인사를 수장에 선임할 수 있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이른바 ‘KB사태’를 겪은 후 ‘기존에 하던 이자 장사나 잘 하자’라는 문화가 은행권에 퍼졌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각 금융지주마다 글로벌 IB 인원을 대폭 축소하는 흐름을 보였는데 이번 정부 들어 다시 해외진출과 비이자수익을 강조하니 지주들로서는 착잡한 심정일 것”이라고 전했다.
■ 해외진출 '중꺾마'의 자세로
1일 금감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6월말 기준 해외자산비율은 KB국민은행이 7.27%(290억달러)로 4대 은행 중 가장 낮다. 신한은행 10.65%(403억달러), 하나은행 10.29%(391억달러), 우리은행 11.13%(378억달러) 등 모두 두 자릿수를 기록 중이지만 유독 KB국민은행만 수치가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감원이 2009년부터 발표해 온 초국적화지수는 KB국민은행이 19.33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13억3200만달러로 가장 많고, 해외 직원도 유일하게 1만명을 웃돈다.
‘KB사태’를 겪었지만 KB금융지주는 2014년 윤종규 4대 회장을 맞이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윤 전 회장은 우리파이낸셜, LIG손해보험, 현대증권, 푸르덴셜생명 등 굵직한 인수합병을 성사시키면서 업계 1위의 토대를 다졌다.
해외진출에서도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2017년 약 1조원의 손실을 보며 BCC를 정리했지만 2018년 인도네시아 부코핀 은행을 인수하며 해외진출 재도전에 나섰다.
현재 성적은 좋지 않다. 최근 3년 동안 약 1조원의 적자를 기록해 다시 ‘실패’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캄보디아 프라삭 은행 인수를 통해 연간 2000억원의 순익을 기록하는 등 합산 해외실적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윤 전 회장은 연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해외진출에 대해 “씨를 뿌리는 중”이라며 길게 볼 것을 주문했다. 실패가 용인되는 문화가 정착되고 있는 것일까.
KB부코핀은행 본사 전경(사진=KB국민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