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동 금융위원장이 2011년 4월 15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현대캐피탈 해킹 사고와 관련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자료=연합뉴스) 현대차그룹은 2000년 그룹 태동기 때부터 금융업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전문성은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정몽구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 금융업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양대 공대를 졸업한 정 회장은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현장 경영’을 중시했다. 우람한 풍채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의 성정이 차분하고 꼼꼼함을 요구하는 금융업과 잘 어우러지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동차와 금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자동차를 키우려면 금융도 함께 키워야 했다. 믿고 맡길 수 있으면서 성장한 뒤에도 배신하지 않을 인물로는 가족 이상이 없다. 둘째 사위 정태영은 여러 면에서 금융업 기준에 부합했다. 서울대와 미국 MIT를 나온 수재에다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이다. 원칙주의자에 가까운 엄격함 등 정몽구 회장이 취약한 자질도 보유했다. 2001년 인수한 다이너스 카드의 경영을 맡긴 배경이다. 다만 사위 정태영도 금융업은 사실 생소했다. 심지어 CEO도 처음이다. 강력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제조업 기반으로 성장해 금융업에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GE가 눈에 들어왔다. GE의 금융계열사인 GE캐피탈은 항공, 에너지 등 기업금융에 강점을 지녔지만 해외에선 소비자금융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현대차그룹과 GE캐피탈은 2004년 전략적 제휴를 맺는다. GE캐피탈은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지분을 각각 40% 이상씩 보유하며 2대 주주이자 파트너가 됐다. ■ 가슴 쓸어내렸던 현대캐피탈 해킹사고 현대차그룹의 금융업 영위에는 경영 노하우 외에 또 다른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재벌’이라는 지위였다. 1997년 외환위기의 여파로 안팎에선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키우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2000년 제정된 금융지주회사법은 그런 사회 분위기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당시 글로벌 추세는 금융의 겸업·대형화였다. 소련 붕괴 이후 세계화의 흐름이 조성됐고 금융자본, 산업자본 할 것 없이 인수합병(M&A)을 통한 몸집 불리기가 활발했다. 나라 안과 밖의 이런 이질적인 분위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2008년 ‘리먼 사태’로 불리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것이다. 당시 미국 5대 투자은행(IB)의 레버리지는 자기자본의 30배에 달했고 5곳 중 3곳은 문을 닫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금융의 겸업·대형화에도 제동이 걸렸다. 규제 강화 목소리도 커졌다. 우리나라는 이미 규제가 강했던 탓에 위기의 변방에 위치했지만 금융당국의 판단은 달랐다. 특히 금융지주회사법에서 벗어나 있는 금융그룹을 주목했다. 금융 전업 그룹 중에서는 교보, 미래에셋, 키움 등이, 대규모 기업집단 중에서는 삼성, 한화, 동부, 태광, 현대, 현대차 등이 타깃이 됐다. 현대차그룹으로선 공정거래법 외에 또 다른 강력한 규제를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실제로 금융위원회는 2015년부터 이를 공론화 시켜 ‘금융복합기업집단 감독법’ 제정에 성공했다.) 금융당국의 힘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경험은 또 있었다. 2011년 4월 현대캐피탈 해킹 사고다. 해커들이 국내와 해외에서 공조해 업무관리자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습득, 서버에 침입해 약 175만명의 고객정보를 탈취했다. 당시 현대캐피탈 전체 회원이 180만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고객정보 전부가 털린 셈이었다. 금융감독원 특별조사 결과 사고 원인은 업무 규정을 지키지 않고 관리를 소홀히 한 인재(人災). 범인은 잡혔지만 해킹된 고객정보의 매매 등 2차 피해 우려가 온 국민을 엄습했다. 그럼에도 금융당국의 징계 수위는 낮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사건 발생 후 신속히 경찰에 신고했고 이후 수사 과정에서도 적극 협조한 점이 참작될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차일피일 결론이 늦춰지더니 8월 말 예상 밖 중징계가 통보됐다. 최초 유출 규모를 42만명으로 축소한 점, 피해 규모가 크고 2차 피해 우려가 지속되는 점 등이 악재로 작용했다. 회사 대표가 사고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벌백계’ 차원에서 엄하게 처분해야 한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었다. 문제는 중징계를 받으면 현대차그룹 전체에 끼치는 악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다. ‘기관경고’를 받은 현대캐피탈 법인은 3년간 보험업, 금융투자업, 상호저축은행업 등에 진출하지 못한다. 정태영 사장도 대표이사직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4년간 금융회사 임원으로도 선임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회사의 소명 과정을 거쳐 임원 제재의 경우 최종 징계 수위는 ‘경징계(주의적경고)’로 낮춰졌지만 그룹으로선 가슴을 쓸어내릴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금융업 규제의 엄격함과 그를 다루는 금융당국의 위세를 깨닫는 계기였다. ■ 그래서 끌어들인 금융카르텔 '김석동' 사람들 현대차그룹은 2010년대 중반부터 사외이사에 퇴직 금융관료를 적극 영입하며 규제 리스크에 대응해 왔다. 기회는 GE캐피탈이 준다. 10년 넘게 보유하던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지분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에서 철수한 것이다. GE캐피탈 몫이던 사외이사 자리에 새로운 인물을 앉힐 수 있었다. 시작은 김광수 전 금융정보분석원 원장이었다. 30년 관료 생활을 마무리하고 법무법인 율촌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2016년 현대캐피탈 사외이사로 합류한다. 행시 27회인 김광수 전 원장은 금융관료 세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인물이다. 현대캐피탈 사외이사 이후 NH농협금융지주 회장, 전국은행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한 것만 봐도 유추가 가능하다. 당시 여신금융협회에 등록된 캐피탈사 50여 곳 중 1급 고위공무원을 유치할 수 있는 회사는 많지 않았다. 현대캐피탈 뒤에 현대차그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김광수 사외이사로부터 바통을 물려받은 퇴직 관료는 훨씬 더 거물급이어서 상당한 화제가 됐다. ‘영원한 대책반장’, ‘관치금융의 화신’ 등 달고 다니는 수식어만 수십 개인 김석동 전 장관. 그는 재정경제부 1차관, 금융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특급 경제관료였다.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금융위원장직을 마친 뒤 법무법인 지평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2018년 현대캐피탈 사외이사직을 수락했다. 여신업계의 한 관계자는 “박현주 회장과 친분이 있다보니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외이사를 맡았을 때는 그럴 수 있다고 했지만 천하의 김석동이 일개 캐피탈 회사의 사외이사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던 당시엔 상당히 놀랍고 의외란 생각이었다”며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김석동이 현대차그룹의 책사가 됐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귀띔했다. 행시 23회인 김석동은 김광수보다 네 기수 선배다. 어려운 시절 동고동락하던 재정경제부 시절부터 김석동은 후배 김광수를 각별히 챙겼다. 김광수도 그런 김석동을 ‘영원한 멘토’로 여기며 깍듯이 따랐다. 각별한 관계는 퇴직 후에도 이어졌다. 김석동은 미래에셋자산운용 이사회 의장 시절 김광수를 사외이사로 불러들인다. 현대캐피탈에서도 선임과 후임으로 나란히 사외이사를 맡으며 각별한 신뢰관계를 이어갔다. 다만 당시 김석동 전 위원장의 현대캐피탈 행이 적절한 것이냐는 논란도 있었다. 현대캐피탈 해킹 사고 당시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김석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금융감독원장은 김석동의 행시 동기 권혁세였다. 제재심의위원회는 금감원 관할이나 금융위원회와 조율을 거친다. 금융위 국장이 당연직 위원으로 포함돼 있다. 결국 현대캐피탈에 중징계를 내린 것도, 이후 경징계로 낮춰준 것도 ‘김석동-권혁세’ 콤비의 책임 아래 이뤄진 일이었다. 권혁세는 금감원장직을 끝낸 후 법무법인 율촌의 고문으로 옮겨 김광수와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강만수(산은금융), 김승유(하나금융), 어윤대(KB금융), 이팔성(우리금융) 4명의 회장은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워 금융계 ‘4대 천왕’으로 불렸다. 행시 8회인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후배 관료 중에서 김석동을 특히 아꼈다. 산은지주 회장일 때 금융위원장이 김석동이었다. 고려대를 나온 정의선 회장의 은사가 어윤대 회장이었고, 어윤대 회장은 당시 ‘강만수 예찬론자’를 자처했다. 어윤대 회장은 현대모비스의 사외이사로도 활동한 바 있다. 김승유 회장은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정태영 사장과 부부 동반 해외여행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시절 4대 금융천왕의 위세는 대단했다”며 “현대차그룹이 특급 퇴임 관료들을 사외이사로 유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인맥과 학맥 등으로 겹겹이 얽힌 ‘금융 카르텔’이 상당부분 작용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대한민국 대표 재벌 중 하나인 현대차그룹의 금융을 들여다 봤다. -편집자주

[현대차와 금융③] GE와 김석동, 금융조력자들

사위 정태영에 'GE' 얹은 금융전략 가동
현대캐피탈 해킹사고로 '덜컹'
GE 빠진 자리에 거물급 금융관료 포섭
현대차그룹의 금융 책사 '김석동' 임팩트
현대캐피탈 해킹사고 중징계→경징계 논란도

최중혁 기자 승인 2024.05.27 10:10 의견 0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2011년 4월 15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현대캐피탈 해킹 사고와 관련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자료=연합뉴스)


현대차그룹은 2000년 그룹 태동기 때부터 금융업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전문성은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정몽구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 금융업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양대 공대를 졸업한 정 회장은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현장 경영’을 중시했다. 우람한 풍채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의 성정이 차분하고 꼼꼼함을 요구하는 금융업과 잘 어우러지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동차와 금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자동차를 키우려면 금융도 함께 키워야 했다. 믿고 맡길 수 있으면서 성장한 뒤에도 배신하지 않을 인물로는 가족 이상이 없다. 둘째 사위 정태영은 여러 면에서 금융업 기준에 부합했다. 서울대와 미국 MIT를 나온 수재에다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이다. 원칙주의자에 가까운 엄격함 등 정몽구 회장이 취약한 자질도 보유했다. 2001년 인수한 다이너스 카드의 경영을 맡긴 배경이다.

다만 사위 정태영도 금융업은 사실 생소했다. 심지어 CEO도 처음이다. 강력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제조업 기반으로 성장해 금융업에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GE가 눈에 들어왔다. GE의 금융계열사인 GE캐피탈은 항공, 에너지 등 기업금융에 강점을 지녔지만 해외에선 소비자금융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현대차그룹과 GE캐피탈은 2004년 전략적 제휴를 맺는다. GE캐피탈은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지분을 각각 40% 이상씩 보유하며 2대 주주이자 파트너가 됐다.

■ 가슴 쓸어내렸던 현대캐피탈 해킹사고

현대차그룹의 금융업 영위에는 경영 노하우 외에 또 다른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재벌’이라는 지위였다. 1997년 외환위기의 여파로 안팎에선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키우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2000년 제정된 금융지주회사법은 그런 사회 분위기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당시 글로벌 추세는 금융의 겸업·대형화였다. 소련 붕괴 이후 세계화의 흐름이 조성됐고 금융자본, 산업자본 할 것 없이 인수합병(M&A)을 통한 몸집 불리기가 활발했다.

나라 안과 밖의 이런 이질적인 분위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2008년 ‘리먼 사태’로 불리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것이다. 당시 미국 5대 투자은행(IB)의 레버리지는 자기자본의 30배에 달했고 5곳 중 3곳은 문을 닫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금융의 겸업·대형화에도 제동이 걸렸다. 규제 강화 목소리도 커졌다.

우리나라는 이미 규제가 강했던 탓에 위기의 변방에 위치했지만 금융당국의 판단은 달랐다. 특히 금융지주회사법에서 벗어나 있는 금융그룹을 주목했다. 금융 전업 그룹 중에서는 교보, 미래에셋, 키움 등이, 대규모 기업집단 중에서는 삼성, 한화, 동부, 태광, 현대, 현대차 등이 타깃이 됐다. 현대차그룹으로선 공정거래법 외에 또 다른 강력한 규제를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실제로 금융위원회는 2015년부터 이를 공론화 시켜 ‘금융복합기업집단 감독법’ 제정에 성공했다.)

금융당국의 힘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경험은 또 있었다. 2011년 4월 현대캐피탈 해킹 사고다. 해커들이 국내와 해외에서 공조해 업무관리자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습득, 서버에 침입해 약 175만명의 고객정보를 탈취했다. 당시 현대캐피탈 전체 회원이 180만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고객정보 전부가 털린 셈이었다. 금융감독원 특별조사 결과 사고 원인은 업무 규정을 지키지 않고 관리를 소홀히 한 인재(人災). 범인은 잡혔지만 해킹된 고객정보의 매매 등 2차 피해 우려가 온 국민을 엄습했다.

그럼에도 금융당국의 징계 수위는 낮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사건 발생 후 신속히 경찰에 신고했고 이후 수사 과정에서도 적극 협조한 점이 참작될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차일피일 결론이 늦춰지더니 8월 말 예상 밖 중징계가 통보됐다. 최초 유출 규모를 42만명으로 축소한 점, 피해 규모가 크고 2차 피해 우려가 지속되는 점 등이 악재로 작용했다. 회사 대표가 사고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벌백계’ 차원에서 엄하게 처분해야 한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었다.

문제는 중징계를 받으면 현대차그룹 전체에 끼치는 악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다. ‘기관경고’를 받은 현대캐피탈 법인은 3년간 보험업, 금융투자업, 상호저축은행업 등에 진출하지 못한다. 정태영 사장도 대표이사직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4년간 금융회사 임원으로도 선임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회사의 소명 과정을 거쳐 임원 제재의 경우 최종 징계 수위는 ‘경징계(주의적경고)’로 낮춰졌지만 그룹으로선 가슴을 쓸어내릴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금융업 규제의 엄격함과 그를 다루는 금융당국의 위세를 깨닫는 계기였다.

■ 그래서 끌어들인 금융카르텔 '김석동' 사람들

현대차그룹은 2010년대 중반부터 사외이사에 퇴직 금융관료를 적극 영입하며 규제 리스크에 대응해 왔다. 기회는 GE캐피탈이 준다. 10년 넘게 보유하던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지분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에서 철수한 것이다. GE캐피탈 몫이던 사외이사 자리에 새로운 인물을 앉힐 수 있었다. 시작은 김광수 전 금융정보분석원 원장이었다. 30년 관료 생활을 마무리하고 법무법인 율촌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2016년 현대캐피탈 사외이사로 합류한다.

행시 27회인 김광수 전 원장은 금융관료 세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인물이다. 현대캐피탈 사외이사 이후 NH농협금융지주 회장, 전국은행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한 것만 봐도 유추가 가능하다. 당시 여신금융협회에 등록된 캐피탈사 50여 곳 중 1급 고위공무원을 유치할 수 있는 회사는 많지 않았다. 현대캐피탈 뒤에 현대차그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김광수 사외이사로부터 바통을 물려받은 퇴직 관료는 훨씬 더 거물급이어서 상당한 화제가 됐다. ‘영원한 대책반장’, ‘관치금융의 화신’ 등 달고 다니는 수식어만 수십 개인 김석동 전 장관. 그는 재정경제부 1차관, 금융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특급 경제관료였다.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금융위원장직을 마친 뒤 법무법인 지평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2018년 현대캐피탈 사외이사직을 수락했다.

여신업계의 한 관계자는 “박현주 회장과 친분이 있다보니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외이사를 맡았을 때는 그럴 수 있다고 했지만 천하의 김석동이 일개 캐피탈 회사의 사외이사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던 당시엔 상당히 놀랍고 의외란 생각이었다”며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김석동이 현대차그룹의 책사가 됐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귀띔했다.

행시 23회인 김석동은 김광수보다 네 기수 선배다. 어려운 시절 동고동락하던 재정경제부 시절부터 김석동은 후배 김광수를 각별히 챙겼다. 김광수도 그런 김석동을 ‘영원한 멘토’로 여기며 깍듯이 따랐다. 각별한 관계는 퇴직 후에도 이어졌다. 김석동은 미래에셋자산운용 이사회 의장 시절 김광수를 사외이사로 불러들인다. 현대캐피탈에서도 선임과 후임으로 나란히 사외이사를 맡으며 각별한 신뢰관계를 이어갔다.

다만 당시 김석동 전 위원장의 현대캐피탈 행이 적절한 것이냐는 논란도 있었다. 현대캐피탈 해킹 사고 당시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김석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금융감독원장은 김석동의 행시 동기 권혁세였다. 제재심의위원회는 금감원 관할이나 금융위원회와 조율을 거친다. 금융위 국장이 당연직 위원으로 포함돼 있다. 결국 현대캐피탈에 중징계를 내린 것도, 이후 경징계로 낮춰준 것도 ‘김석동-권혁세’ 콤비의 책임 아래 이뤄진 일이었다. 권혁세는 금감원장직을 끝낸 후 법무법인 율촌의 고문으로 옮겨 김광수와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강만수(산은금융), 김승유(하나금융), 어윤대(KB금융), 이팔성(우리금융) 4명의 회장은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워 금융계 ‘4대 천왕’으로 불렸다. 행시 8회인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후배 관료 중에서 김석동을 특히 아꼈다. 산은지주 회장일 때 금융위원장이 김석동이었다. 고려대를 나온 정의선 회장의 은사가 어윤대 회장이었고, 어윤대 회장은 당시 ‘강만수 예찬론자’를 자처했다. 어윤대 회장은 현대모비스의 사외이사로도 활동한 바 있다. 김승유 회장은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정태영 사장과 부부 동반 해외여행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시절 4대 금융천왕의 위세는 대단했다”며 “현대차그룹이 특급 퇴임 관료들을 사외이사로 유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인맥과 학맥 등으로 겹겹이 얽힌 ‘금융 카르텔’이 상당부분 작용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대한민국 대표 재벌 중 하나인 현대차그룹의 금융을 들여다 봤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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