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조원대 퇴직연금 시장을 둘러싼 총성없는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퇴직연금 실물 이전제도를 계기로 더욱 장벽이 낮아지면서 회사에서 회사로, 업권에서 타업권으로 고객들 선택의 폭이 한층 넓어졌다. 반면 우물 안에서 경쟁하던 금융회사들로선 경쟁자가 많아진 셈. 다양해지고 활발해지는 퇴직연금 시장에서 고객들은 은퇴부자를 향한 꿈을 과연 이뤄낼 수 있을까.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이달 31일부터 현재 가입한 상품들을 그대로 유지한 채 퇴직연금을 갈아탈 수 있게 됐다. 당초 15일 시행을 목표로 진행됐던 이전제도는 안정적인 서비스 제공을 위한 추가 기간 확보를 위해 개시 일자를 다소 미뤘다.
기존 퇴직연금은 금융회사 변경시 보유 중인 상품을 모두 매도한 뒤 현금화해야만 이동이 가능했다. 이에 만기일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가입자들이 이자 수익을 포기하거나 해지로 인한 수수료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이전 이후 다시 상품을 매수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가입자들 몫이었다. 하지만 이번 제도를 계기로 이 같은 절차 없이 현재 보유 중인 상품 그대로 퇴직연금 운용사 이전이 가능해진다.
제도 시행을 가장 반기는 곳은 증권사들이다. 증권사들은 은행 고객 대비 다양한 투자상품에 대한 수요가 높은 고객들의 입맛에 맞게 라인업을 확장해온 만큼 퇴직연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려는 고객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
일례로, 퇴직연금으로 투자할 수 있는 상장지수펀드(ETF)의 경우 은행의 연금계좌에서 거래 가능한 상품은 평균 100~150개 수준이다. 현물이전 제도 시행에 대비하기 위해 KB국민은행은 기존 68개에서 101개로, 신한은행은 131개에서 177개로 확대하며 방어전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증권사들은 이미 상장돼 있는 대다수의 ETF에 투자 가능해 상품 라인업에서 차이를 보인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증권사는 금융투자사라는 정체성 만큼 사실상 모든 상품들이 자동라인업되는 시스템인 반면 은행은 고객들의 특성이나 업의 성격상 상대적으로 적은 상품들은 선별적으로 갖춰놓은 것이 차이”라며 “증권사의 경우 장외 채권을 포함해 다양한 상품들을 온라인으로 실시간 매수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어 자산관리에 관심 있는 고객들에게 선호도가 높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지난해 기준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이 증권사 기준 7.11%인 데 비해 은행은 4.87%로 상대적 우위를 점한다. 반면 퇴직연금 수수료의 경우 증권사(0.325%) 대비 은행(0.412%)이 높아 수수료 경쟁력에서도 증권사가 유리하다.
다만 모든 퇴직연금 가입자가 이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퇴직연금 현물이전은 확정기여(DC)형 가입자에 한해 가능하다. 확정급여(DB)형은 현물이전 제도에서 제외돼 이동을 원할 경우 먼저 유형 변경부터 해야 한다. 개인형 퇴직연금(IRP)의 경우 같은 IRP 계좌로 변경 가능하다.
이전 가능한 상품들로는 예금, 정부보증채권, 회사채 등 채권, 원리금보장 파생결합사채, 펀드, 상장지수펀드(ETF) 등이 있다. 반면 주식과 리츠, 디폴트옵션, 파생결합증권, 금리연동형보험은 실물 그대로 계좌 이전이 불가능하므로 본인의 투자 자산 현황을 먼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전하는 금융사에서 현재 가입 중인 상품을 취급하지 않는 경우 기존과 같이 상품을 매도한 뒤 현금으로 바꿔 이전해야 한다.
한편 대부분의 증권사들은 고객 유치를 위해 마케팅 경쟁에 한창이다. 미래에셋증권은 실물이전 사전상담 신청 고객들에게 GS모바일 상품권을 제공하고 있고 오는 31일 이후 100만원 이상 실물이전을 완료한 고객들에게는 3만원 상당의 신세계 모바일 상품권을 지급한다. 한국투자증권도 IRP 이전 고객들에 대해 추첨을 통해 LG전자 스탠바이미, 네스프레스 버츄오 플러스 등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삼성증권도 1000만원 이상 이전 시 백화점 상품권 3만원권을 지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