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벌면 빨간 지붕 양옥을 짓겠다. 그리고 동해로 고래를 잡으로 가겠다. 동해엔 고래 한 마리, 예쁜 고래 한 마리가 있다.”

고(故) 하길종 감독의 작품 ‘바보들의 행진’(1975년 개봉)에서 ‘영철’이는 ‘고래 사냥’를 꿈꾼다. 대학가 무기한 휴강이 심심치 않던 1970년대. 영화는 유신체제의 그늘에서 방황하는 대학생들의 좌절과 사랑, 혹은 현실도피성 꿈을 펼친다.

작가 고 최인호의 동명 신문연재소설이 원작이다. 카메오로 영화에 등장한 최인호는 주제곡 ‘고래사냥’의 노랫말을 짓고 송창식이 곡을 만들고 불렀다.

청춘의 노래 ‘고래사냥’은 염세주의를 부추긴다는 검열아래 금지곡에 묶였다. 노랫말은 이렇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 보아도 /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 /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 기차를 타고 /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 고래 잡으러 / 우리들 사랑이 깨진다 해도 /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 / 우리들 가슴 속에는 뚜렷이 있다 / 한 마리 예쁜 고래 하나가 /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 고래 잡으러 /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 고래 잡으러”

누구는 청춘의 이상을 ‘고래’로, 꿈을 좇는 여정을 ‘사냥’으로 풀이한다. 억압적 현실속의 자유를 상징하는 게, 자유를 추구하는 게 ‘고래사냥’이라며.

작가도 가수도 당국의 검열에서 사냥감 ‘고래’의 의미를 별도 설명하지는 않았다. 돈을 벌면 고래를 잡으로 갈 것이라는 영철의 읊조림은 이상을 추구하기엔 현실이 고달프다는 걸 읽게 할 뿐이다.

경북 포항시 앞바다에 위치한 대왕고래 유망구조에서 웨스트 카펠라호가 탐사 시추 작업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다음 대통령선거에서 주식투자자들 표심(票心)을 결정짓는 데에 한 변수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 동해 심해 석유-가스전 탐사(대왕고래 프로젝트)는 윤석열 정권의 아킬레스건으로 굳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란 우두머리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발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대왕고래 프로젝트는 선거판 불쏘시개로 점화될 게다.

지난해 6월3일 윤 대통령의 뜬금없는 국정브리핑 1호는 1400만 주식투자자의 눈과 귀를 붙잡았다. “1990년대 후반에 발견된 동해가스전의 300배가 넘는 규모이고, 우리나라 전체가 천연가스는 최대 29년, 석유는 최대 4년을 넘게 쓸 수 있는 양이라고 판단된다”고 그는 이 프로젝트의 고무적 전망을 거침없이 내놨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매장가치가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5배(약 2200조원) 수준”이라고 친절(?)하게 덧붙였고 증시는 격하게 반응했다. 발표 당일 한국가스공사 주가는 가격제한폭까지 폭등했고 증시 안팎에서는 대왕고래 테마주를 엮는 보고서들이 쏟아졌다. 언론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어느 매체들은 활자 크기를 ‘고래’포인트로 대폭 키웠다.

하지만 대통령이 띄운 ‘산유국 코리아’ 애드벌룬은 8개월 여 만에 추락하면서 막대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치러야 하는 지경에 몰렸다. 지난 6일 산자부는 “대왕고래 프로젝트의 1차 탐사 시추결과는 경제성을 확보할 만큼 유의미 하지 않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사실상 실패로 끝났음을 인정한 것으로 시장에서는 받아들였다. 게다가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생각지 못했던 정무적 개입으로 (경제적 가치에 대한) 비유가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는 등 의도치 않았지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삼성전자 시총 5배론’에 대한 기자들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대왕고래 프로젝트에 모종의 정치-정략적 노림수가 숨겨진 게 아니냐는 합리적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허술한 검증, 과대 포장된 전망, 그 정치이벤트로 변질된 석유 개발 사업의 참담한 현실은 온전히 윤석열의 오만과 독선이 부른 결말”(더불어민주당) “4·10 총선에서 심판받은 윤석열 대통령이 호들갑을 떨 때부터 알아봤다. 석유·가스 경제성 확인도 전에, 시추 이전 단계부터 자신의 치적으로 만들기 위해 ‘희망고문’한 책임은 어떻게 질 거냐”(조국혁신당)

▶대왕고래 프로젝트 1차 탐사 시추 실패는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이 짙은 주식투자자들에게 더욱 큰 상처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윤 대통령의 국정브리핑을 자원개발 정책재료로 판단해 투자에 나섰지만, 대통령 재료에 대한 믿음의 결과는 ‘경제성 없음’으로 허망하게 귀결됐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발표와 1차 탐사결과 발표 전후의 주가흐름을 살펴보자. 지난해 6월3일 대표적인 대왕고래 프로젝트 관련 종목으로 평가받던 한국가스공사 주가는 전 거래일 보다 거래량이 40여배 폭증한 1340만 여 주를 기록하면서 가격제한폭까지 치솟았다. 이후 종가기준으로 당월 24일엔 6만3500원을 기록했다. 1차 탐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인 올해 2월7일 한국가스공사 주가는 13.8% 급락해 3만550원에 마감했다. 관련 테마주들도 하향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이런 정책 및 주가 흐름에서, 정부의 대왕고래 프로젝트를 믿고 가스공사 주식을 지금까지 보유하고 있는 중장기 투자자라면 심경이 어떨까. 주당 매입가격은 둘째 치고 대통령이 마이크를 잡고 발표한 정책이 이렇게 허술하고, 나아가 사기성 프로젝트라는 비난까지 받는다면 이들은 향후 대선에서 윤석열표 정책을 지지할 마음이 들까.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힐 때 분노와 배신감은 더 크다.

큰 선거를 앞두면 정치권은 주식투자자들에게 애정공세를 편다. 단적으로 올해 시행하기로 했던 금융투자소득세가 지난 해 말 유예도 아닌 폐지로 우여곡절 끝에 방향을 튼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도자의 발언과 발표가 결론적으로 속빈 강정으로 판정된다면 그 지도자는 시장에서 퇴출될 수 밖에 없다.

대왕고래 프로젝트는 윤 정권의 자승자박 대형 악재로 차기 대선에서 작동할 소지가 크다. 이런 와중에 현 내란심판 정국의 말다툼 양상을 볼 때 여권측은 “석유-가스가 나올 때까지 시추를 하면 되는데 야당이 반대하고 있어서 우리가 산유국이 못되고 있다”고 나설 수 있을 것 같아 ‘엄중하게’ 지켜본다.

▶마음 속 푸른 바다에 고래 한 마리를 키우는 이들이 많을 게다. 영철은 “고래는 동해바다에 있지만 내 마음 속에 있기도 해. 지금까지 난 그걸 몰랐다”는 말을 던진 후 결국 자가용으로 우기던 자전차(거)로 동해로 뛰어든다.

영철의 고래사냥이 50년이 지난 지금, 현직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헌법 다툼이 진행되는 지금에도 우리는 자신의 ‘고래사냥’에 몰두하는 일상사를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보들의 행진’에서 영철과 병태는 친구들과 당구를 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누구는 ‘돈’을 들고, 누구는 ‘석유’를 말한다. 영철은 ‘믿음’이라고 했다.

“2025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명재곤은 헤럴드경제, 뉴스핌, 브릿지경제 등 언론사에서 30여년 간 기자 및 데스크로 활동했다. 석재조합에서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취재하며 소통해 왔다. 소비자들 입장에서 세상을 들여다 보는 편이지만 한때 기업에서 일한 터라 공급자 처지도 이해한다. 경제나 정치에서 극단을 멀리하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