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AI 세상이다. 2016년 인류에 경종을 울린 알파고의 등장 이후, 인공지능은 ‘신들의 게임’이라 불리는 바둑을 한순간에 장악했고, 최근 생성형 AI 챗GPT의 폭발적인 성장은 AI 패권 시대를 앞당겼다. 인공지능의 촉매제가 되었던 바둑을 통해서 문학, 미술, 음악 등 창작의 영역까지 일상에 스며든 AI 별천지를 둘러보고, 당면한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맞아 우리가 AI와 동행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한다.
#3. 인류 최후의 1승으로 남다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던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알파고의 완승으로 끝났다. 하지만 인류의 충격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세돌 9단의 유일한 승리를 이끈 네 번째 대국의 78수는 신의 한수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2016년 3월 13일. 내리 3연패를 당한 이세돌은 극심한 압박과 부담감 속에서 대국장에 들어섰다. 이대로 물러나면 인공지능에 맞서 인류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백척간두에 직면한 상황. 이날 대국은 우변 바꿔치기로 이세돌의 실리와 알파고의 세력이 맞선 가운데, 상변에서 중앙까지 알파고의 두터움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불리한 형세로 중반전에 돌입할 무렵, 이세돌은 중앙에서 한 칸 사이를 끼우는 기상천외한 승부수를 던졌다. 대국을 검토하던 프로기사들과 해설자들은 일제히 탄성을 자아냈다. 중국에서 해설하던 구리(古力) 9단은 “아름다운 수”라고 극찬했고, 전날까지 “인류 대표로서 자격이 없다”며 독설을 쏟아냈던 커제(柯洁) 9단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때부터 알파고는 의문의 수를 남발하며 순식간에 무너졌다. 결국 이세돌은 알파고의 항서를 받아내며 천신만고 끝에 1승을 거뒀다. 이는 알파고를 상대로 인간이 거둔 최후의 승리로 남게 된다.
국내 언론과 외신은 인공지능의 기술이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안도감 속에서 “마침내 인간이 이겼다”, “이세돌의 승리이자 인류의 승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승리” 등 다소 격한 메시지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훗날 구글 딥마인드 개발진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세돌이 터트린 묘수는 0.007% 확률을 뚫은 판단으로 거의 1/10,000도 안되는 희박한 돌파구를 인간의 직관으로 찾아낸 것이다. 인공지능이 둘 수 없는 수였고, 인간만이 둘 수 있는 수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낸 동력은 바로 인간의 창의적 감각과 직관이었다.
(자료=강헌주, 챗GPT 활용해 제작)
#4. 알파고 무너뜨린 인간의 창의적 감각과 직관
이전까지 바둑의 신처럼 완벽한 수읽기를 자랑하며 반상에서 최적의 수를 찾아냈던 알파고가 갑자기 멘붕에 빠지고 무너진 까닭은 무엇일까.
알파고는 딥러닝 기반의 강화학습을 통해 바둑을 학습하고, 수많은 기보를 통해 각 상황에 맞는 수를 찾아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가치 네트워크(Value Network)를 통해 현재 바둑판의 유불리 상태를 평가하고 승률을 계산한다.
그러나 이세돌이 착점한 78수는 알파고의 학습 데이터나 시뮬레이션에 등장하지 않았던 희귀한 수였다. 유망한 수를 중심으로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MCTS)을 거치는 알파고 입장에서 1/10,000 확률은 탐색 경로의 이탈인 셈이다. 학습 패턴에 없는 수는 알파고에게 예측하기 힘든 확률적 모델이기 때문에 버그나 다름없는 엉뚱한 수를 남발한 것이다.
결국 4국에서 알파고가 패배한 원인은 알파고의 학습 데이터와 평가 시스템의 한계, 그리고 인간의 감각적인 수에 대한 대처 능력 부족 탓이었다. 어찌 보면 남들이 두는 정석이 아닌 창의적인 바둑을 바탕으로, 기계적인 수순보다 직관적인 수읽기를 즐겨하는 이세돌이었기에 탄생한 시나리오였을지 모른다. 알파고의 딥러닝 모델과 다른 방식으로 인간만이 연출할 수 있는 직관과 전략이 난공불락 같던 알파고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5. 알파고의 유산(遺産)
바둑을 위해 태어난 알파고는 2017년 5월 중국의 일인자 커제 9단과의 대국을 끝으로 바둑계(?) 은퇴를 선언했다. 공식 전적 68승 1패의 기록을 남기고, 같은 해 12월 알파고의 모든 자원을 다른 인공지능 개발 소스로 확장하면서 구글의 알파고 개발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알파고 은퇴 후, 구글 딥마인드는 더욱 강력한 버전으로 알파고 마스터와 알파고 제로를 잇달아 공개했다. 알파고 마스터는 세계 정상급 프로기사들을 상대로 60연승을 거두며 그 위용을 과시했다. 그러나 진정한 AI 바둑의 강자는 알파고 제로였다. 알파고 제로는 인간의 기보를 학습하지 않고, 오직 자신과의 대국을 통해 자가 학습했다. 그 결과 알파고 마스터를 상대로 100승 무패를 기록하며 AI 바둑의 새 시대를 알렸다. 또한 이름에서 바둑을 뺀 알파제로는 체스와 쇼기(일본 장기) 등 다양한 장르에서 스스로 진화했다.
알파고의 후예들은 AI 학습의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전 세계 기술과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인공지능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알파고의 성과를 기반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AI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예컨대 알파고 시스템의 강화학습 알고리즘은 로보틱스, 의약, 금융 분석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생명체의 복잡한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AI로 202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알파폴드(AlphaFold) 역시 알파고 일가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다.
국내외 바둑계에도 수많은 포스트 알파고가 등장했다. 알파고 제로의 논문이 알려지며 교육툴이 공개되었고, 오픈 소스 AI 바둑이 속속 등장하면서 프로기사들이 인공지능을 활용해 바둑을 배우는 시대가 도래했다. 혹자는 기원 전후에 빗대어 BC(Before Computer)와 AD(After DeepMind)로 구분하여 바둑의 역사를 알파고 이전과 이후로 나누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인공지능의 상징이 된 알파고의 등장은 이처럼 강렬했다. 마침내 AI 바둑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 강헌주 PD는 바둑TV, 온게임넷(OGN), 투니버스 등에서 미디어 콘텐츠 사업을 총괄했다. 세계 최강의 한국 바둑과 e스포츠의 중심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시도했고, 2003년 프로 단체전이 전무했던 시절 한국바둑리그를 기획하여 출범시켰다. 현재 KB바둑리그는 세계 최고의 바둑리그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