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사진=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예전부터 수학이 싫어 문과를 택했다. 대학에 입학하며 전공을 정해야 했는데 이번엔 법전을 딸딸 외워야 하는 법학이 싫었다. 적당히 말로 때우면서도 졸업후 밥벌이가 되는, 머리 아픈 수학엔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경제학을 택했다. 그런데 최악의 선택이었다. 사회에 나와 돈 버는데 그다지 도움도 안되고, 나름 외워야 할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학부 첫 학기부터 대학원까지 온통 수학과 통계학으로 뒤범벅이 된 과목들 틈바구니에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지내야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것일까. 경제학이 사람들의 선택과 행동을 예측하기 위한 사회과학이란 점을 몰랐던 것이 꼬임의 시작이었다. 학부 초기부터 경제학의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말과 철학으로 깔끔하게 풀던 예전 아담 스미스적 경제학은 이미 무대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시장 균형을 달성하는 과정과 이를 추동하는 에너지를 계산하는 동태경제학이 부상했다. 미국서 공부하고 온 교수들 상당수도 이공계, 자연계 출신이었다. 다시 말해 미분과 적분에 도가 튼 이들이었다.

몇 년 지나자 합리적 기대가설이 등장했다. 경제학은,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상대방이 저렇게 행동하는 반응을 예측해 시장의 균형을 계산하는, 나쁘게 말하면 도박의 승률을 계산하듯 복잡한 반응 함수를 쳐다 보아야 하는, 생소한 학문으로 변모했다. 두 가지 변화를 섞다 보니 거시경제 예측 모델 하나를 시뮬레이션 하는데도 수많은 방정식과 데이터, 반복 계산이 거듭돼 결과치를 해석하는 것 자체가 숙제가 되는 이상한 학문이 됐다. 요약하면 경제학자가 경제를 예측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지금은 어떨까. 리서치를 손에서 놓은지 오래돼 잘 모르겠지만, 이제는 빅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켜 사람들의 반응을 무한반복 연산으로 계산하도록 명령어를 넣고 결과치를 집계해 보면서 경이로워 하는 '불가지' 세상이 열리고 있는 것 같다.

오랫동안 단순논리보다는 복잡한 인간사회의 상호 관계 속에서 경제현상을 예측하고 이해하는 것에 익숙해진 필자는 오랫만에 단비처럼 '반갑고 깔끔한' '경제이론'을 만났다. 이번에 트럼프가 불붙인 관세전쟁의 논리적 배경이라는 '미란 보고서'가 그것이다. 트럼프의 경제책사로 알려져 있는 스티븐 미란(Stephen Miran)은 현재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다.

미란은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전 세계에 달러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다 보니 세계 시장에서 달러가 항상 과대평가돼 왔고, 이 때문에 미국인들이 생산한 상품의 국제가격이 경쟁국들보다 높게 형성돼 결국 만성적인 가격경쟁력 부족과 무역적자로 이어졌다고 봤다. 이는 미국내 제조업의 쇠퇴와 일자리 상실로 이어졌고, 미국이 전 세계의 안보 질서를 책임지면서 지출한 막대한 군비까지 더해지면서 지금 미국이 직면한 어마어마한 국가부채와 산업공동화, 만성적 실업 등 온갖 거시경제적 문제를 발생시켰다고 했다.

이 모든 문제를 푸는 미란의 해법은 단순명료하다. 우선 전 세계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상품교역에 대해 거액의 관세를 부과해 교역상대국의 부를 미국 정부의 재정 수입으로 이전시킨다. 이후 가칭 '마러라고 협정'이라고 하는 다자 환율 협상을 통해 약달러를 구현, 세계시장에서 미국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무역 구조를 재편한다. 동시에 관세를 회피하려는 첨단산업들이 미국 국내로 이전하게 해 미국의 제조업 생태계를 되살리고 기술 경쟁력을 복원한다. 이 과정에서 관세를 무기로 우방국 정부들이 더 많은 방위비를 부담토록 하며, 미국 국채를 100년짜리 초장기 국채로 들고 있게 해 미국 정부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재정적 부담도 낮춘다. 이렇게 되면 미국 경제는 회생되고, 전 세계에 대한 미국이 쥐고 있는 헤게모니도 유지할 수 있다.

너무나 깔끔하고 탁월한 논리여서 '우와' 하는 경탄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왠지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다. 400년전 유럽 절대왕정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하던 중상주의(Mercantilism) 정책과 너무 닮았다. 즉 나라들이 앞다퉈 이런 짓을 하다보니 제국주의 전쟁이 사방에서 터졌고, 시장 왜곡으로 혁신과 경제성장이 더뎌졌다. 소비자 피해와 계층갈등도 심해졌고, 국제 금융체제마저 불안해졌다. 이에 결국 폐기해 버린 구닥다리 인근궁핍화정책(Beggar thy neighbor policy)이 그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1930년 스무트-호울리 관세법으로 관세전쟁을 일으켰다가 결국엔 대공황으로 밑천을 탈탈 털려야 했던 바로 그 나라다.

미란이 말하는 '미국의 희생'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대목이다. 다른 나라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기축통화국 노릇을 오래도록 한 것이 미국에 그토록 큰 고통이 되었다니 말이다. 미국 FRB가 발행하는 달러 본원통화는 미국 국채를 매입하거나 시중은행의 지불준비금 형태로 시중에 뿌려진다. 세계 각국은 제품과 서비스의 교역을 통해 미국서 새로운 달러를 가져간다. 그래서 무역적자 구조가 고착된다는 것이 미란의 주장인 것 같다. 그런데 과연 세계 시장에 달러자산을 공급하는 방법이 미국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밖에 없었을까. 세금은 못 올리고 돈 쓸 곳은 많으니 눈 딱 감고 FRB가 사 준 국채로 생긴 수입을 재정지출에 썼다는 것이 더 맞는 해석이 아닐까. 2020년 미국의 본원통화 잔고는 그 전년도 3조달러대에서 6조달러로 급증했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신음할 때 미국은 3조달러나 되는 돈을 찍어서 위기를 넘겼다. 달러가 시중에 풀린다 해도 교역상대국들이 물건 팔고 가져가니 미국인들은 물가 걱정을 안 해도 됐다. 이걸 동정해 주라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오히려 부럽다. 기축통화국이 주는 이익이 장기적으로 경제에 독이 됐다는 분석에는 동의하지만 그게 미국의 교역파트너들 잘못이고 그들이 미국을 착취한 것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많이 나간 논리다.

애초에 발권력이 주는 유혹에 쉽게 빠진 것이 문제였다. 국채를 활용한 방만한 재정지출을 억제하고, FRB가 준 달러를 대외 차관이나 해외투자로 공여했다면 외국인들이 그 구매력을 통해 미국 제품을 샀을 것이다. 미국 시중에 돈이 덜 풀렸다면 국내 물가 상승도 억제돼 가격 경쟁력도 올라갔을 것이다. 세계경제가 지금처럼 방만하게 성장할 순 없었겠지만 최소한 미국은 무역흑자국이자 채권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미란의 '처방'은 오만하다. 그는 경제학도들이 이미 오래전 그만둔 정태적 분석을 한다. 미국의 교역상대국들을 곤충채집판에 꽂힌 풍뎅이처럼 꼼짝 못하고 당해야 하는 존재로 취급한다. 미국이 관세를 내라면 알아서 가격 낮춰 수출하고, 환율을 강제조정해 주고, 방위비 예산도 팍팍 늘리고, 각 나라의 목숨줄같은 첨단산업과 일자리가 미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눈뜨고 보고만 있어야 한다. 미국 정부가 어렵다고 하니 원하는 대로 저금리의 100년짜리 국채도 왕창 사줘야 한다. 1997년 11월 21일 외환위기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던 우리나라는 IMF로부터 195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빌리기 위해 4대 부문의 뼈를 깍는 구조개혁을 해야 했고 수많은 중소기업, 국민들이 파산하고 직장을 잃었으며, 살 길이 막힌 가장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또한 미국의 교역 상대국들은 과연 미란 리포트가 그리는 것처럼 미국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해줄 수밖에 없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일까. 미국 GDP의 세계 GDP중 비중은 1960년대 40%에서 26%로 줄어든 상황에서 미국이 관세로 시장의 문을 걸어 잠근다면 세계 경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26%보다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소위 마러라고 협약으로 달러약세를 강제한다면 굳이 달러의 가치를 믿고 들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달러 국채를 많이 갖고 있다가는 자칫 현저한 자산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역상대국들에게 만기 100년의 저리 국채를 들고 있으라고? 그러면서 달러 패권이 앞으로도 유지될 거라 전망하는 이 뚝심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미란의 처방대로라면 세계 경제는 미국 달러의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쇄국의 함정에 빠진 미국의 영토 밖에서 과거 미국이 가르쳐 준 자유무역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면서 미국 없는 평화와 번영을 찾아야 할 것이다.

트럼프는 지금까지 미란의 처방을 착실하게 따라 왔다. 모든 나라에 10%의 기본관세 부과를 선언하고, 무역수지 적자 비율에 따라 추가 10% 이상의 상호 관세를 매기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한국, 일본과 같은 나라에는 관세를 레버리지로 방위비 협상을 하겠다는 뜻도 명확히 했다. 보복 관세를 시행하는 나라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도 서슴치 않는다. 이제는 마러라고로 각국 정상들을 불러 노익장의 드라이버 비거리를 자랑하면서 약달러를 관철할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이란 암초를 만났다. 미 국채 가격이 급락하면서 미란의 명료한 청사진이 송두리째 흔들릴 위기다.

처음부터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혁신은 고통과 인내라는 거름위에서 뿌리를 내린다. 미국이 기축통화국이라는 초월적 지위를 배경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을 석권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실물경제의 경쟁력 확보는 전혀 다른 얘기다. 미국 국민에게 낮은 물가와 물질적 풍요라는 공갈 젖꼭지를 물려줄 것이 아니라, 질박과 근면이라는 새로운 덕목을 요구해야 한다. 부단한 연구개발과 실물투자로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지켜나가고, 치열한 교육훈련을 통해 추월하기 어려운 인적 기술력을 확보해야 한다. 세계시장 점유율을 늘려나가기 위해 적극적인 마케팅에도 나서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선 각종 보조금으로 산업의 가격 경쟁력도 보완해야 한다. 관세라는 만병통치약 하나로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란 게으른 상상이 아닌 흑자를 원한다면 흑자를 낼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트럼프 1기 이후 미국 스스로 자유무역의 모든 금기를 깨버린 지금, 미국의 선택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넓다. 다들 미국이 뻔뻔하다고 생각하니 굳이 안 그런 척 할 필요도 없다. 트럼프의 미국이 그토록 손가락질 하는 'Money Machine' 한국처럼 '반칙'을 해도 좋다.

다만 반칙에도 '도리'와 '예의'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다. 경쟁자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속도를 줄이는 것이 아닌 내가 앞서 가기 위해 장딴지에 힘을 더 주는 '도리', 시합에 졌다고 처음부터 다시 하자며 판을 깨는게 아닌 고개를 숙이고 한수 배우겠다고 하는 '예의', 인류 역사상 가장 번성한 문명을 가능하게 했던 자유무역의 소중한 질서를 깨려 했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할 줄 아는 '용기'가.


박원주는 현재 중앙대 특임교수이자 삼성증권 사외이사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를 나와 행시 31회로 공직에 들어섰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산업정책과 에너지, 자원분야를 주로 담당했다. 박근혜 정부에선 청와대 산업통상자원비서관으로, 문재인 정부에선 특허청장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을 자처하는 경제수석 당시엔 주로 기획재정부나 교수 출신이 선임돼 온 관행을 깨고 산업부 출신으로 처음으로 내정돼 화제였다. 그는 한국 경제와 산업, ESG에 대해 글을 풀어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