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마다 정원사는 마른 가지를 손질해 나무의 숨통을 틔운다. 병든 가지는 잘라내야 나무 전체가 건강해지지만, 섣불리 손을 대면 아직 꽃도 피우지 못한 어린 순까지 함께 잃을 수도 있다. 상장기업 퇴출제도도 이와 비슷하다. 시장 건전성을 지키려는 규제의 목적은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성장 가능성이 남아있는 기업까지 꺾지 않도록 면밀한 판단이 필요하다.

한국 자본시장은 1980년대말 퇴출 규정을 도입한 뒤, 외환위기·분식회계·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조금씩 기준을 조정해 왔다. 최근 금융당국이 발표한 제도 개편안은 부실 기업을 조기에 정리해 투자자 피해를 줄이겠다는 취지를 담았다. 매출액 100억원 미만, 시가총액 300억원 이하의 정량 요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일시적인 적자를 감수하며 신사업에 투자해야 하는 중견·중소 벤처 기업들로선 해당 기준이 다소 촘촘하게 느껴질 수 있다. 예컨대 차세대 배터리 소재를 연구하는 한 스타트업은 설비 투자를 위해 적자를 감수 중인데, 새 기준이 곧바로 적용된다면 사업 성과를 증명하기도 전에 퇴출 심사를 받아야 한다.

개선 기간이 1년 남짓에서 6개월로 줄어드는 점도 현실적인 과제다. 유동성이 넉넉지 않은 중소·중견기업이 반 년 안에 재무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는 쉽지 않다. 만약 퇴출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면, 주주·채권자·임직원 모두가 급격한 변동성을 겪을 우려가 있다. 기업 부실을 예방하는 취지와, 회생 기회를 충분히 보장하려는 취지가 균형을 이뤄야 하는 이유다.

또 다른 관점은 해외 상장 유인의 확대다. 규제가 강화될수록 일부 기업은 미국 나스닥이나 홍콩 증시 등 상대적으로 유연한 시장을 선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최근 몇 년 사이 해외로 발길을 돌린 기술 기반 기업들의 사례도 있었다. 혁신 기업이 국내를 떠나면, 장기적으로는 국내 자본시장과 투자자들에게도 기회가 줄어든다.

제도 설계를 정교하게 다듬기 위해선 산업·규모별 특성을 반영한 다층적 평가가 필요하다. 예컨대 기술력·수주 전망·ESG 추진 현황과 같은 비재무 지표를 함께 살핀다면, 단기 실적이 부진하더라도 잠재력이 큰 기업에겐 숨 고를 시간을 줄 수 있다. 한편 개선 기간이 짧아진다면, 기업 재무 컨설팅이나 정책 자금 지원 같은 실질적 회생 프로그램을 병행해 변화 속도를 완화할 필요도 있다.

투자자 보호 장치 역시 중요하다. 상장폐지 절차가 개시되면 일정·절차·예상 손실 등을 투명하게 안내하고, 주식 정리매매나 환매청구권 같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소액주주 부담을 완화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퇴출 결정이 최종 확정되기 전까지 투자자들이 대응 방안을 모색할 충분한 시간을 갖는다면, 시장 전체의 충격도 줄어들 것이다.

해외 주요 증시의 경험도 참고할 만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거래소는 중소기업 시장(SME)에서 재무·거버넌스 요건은 엄격히 유지하되, 연구개발 투자 비중이 높은 기업에는 일정 기간 손실을 허용하는 ‘혁신 면제제’를 두고 있다. 일본 역시 성장 기업을 위한 ‘그로스(Growth) 시장’에서 3년간의 실적 관찰 기간을 제공하며, 해당 기간 중 전략 보고서를 의무 공시하게 함으로써 투자자와의 신뢰를 유지한다. 우리 시장도 이런 사례를 참고해 기술 집약적 기업에 맞춤형 유예·모니터링 제도를 도입한다면, 규제의 실효성과 혁신 보호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디지털 자산·핀테크처럼 사업 모델이 빠르게 진화하는 분야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불확실성이 큰 만큼 리스크 관리체계에 대한 요구 수준은 높아지겠지만, 같은 이유로 단기 수익성만으로 기업 가치를 평가하기 어렵다. 따라잡기 어려운 속도로 변하는 환경에서, 지나치게 고정된 잣대는 실제 위험보다 과도한 처분을 초래할 소지가 있다.

이번 퇴출제도 개편은 시장의 투명성과 신뢰를 높이려는 정책적 의지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병든 가지를 적시에 솎아내야 나무는 건강해지지만, 햇빛을 받기 전의 어린 순도 보호해야 한다. 규제 목적이 투자자 보호와 시장 신뢰 확보에 있는 만큼, 그 과정에서 기업과 이해관계자들이 예측 가능한 환경 속에서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제도가 돼야 한다. 따라서, ‘선별적 엄격함’과 ‘합리적 유연성’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이 필요하다.

코스닥을 포함한 우리 자본시장이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기업들의 터전이 되려면, 단순히 무른 기업을 솎아내기보단, 살아날 수 있는 기업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해 보인다.


김종선 대표는 경영학박사로, 현재 기업 경영 자문 및 밸류업 관련 전문컨설팅회사를 운영 중이다. 지난 30여년간 코스닥협회 등에서 상장회사관련 제도개선 및 상장회사 지원 업무를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초기기업부터 상장회사까지 성장 과정 전반에 관한 전문적 자문을 활발히 수행하고 있다. 아울러 벤처 및 상장회사 관련 제도개선에도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등 기업 애로사항 해소를 위한 부분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