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영화 '노리개' 스틸컷)
물방울이 모였다. 모인 물방울은 웅덩이가 아닌 해일이 돼 대한민국을 덮쳤다. 작은 물방울들은 자신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다룬 손가락의 주인공들을 정조준하고 있다. ‘#미투’ 열풍으로 시작된 성폭력 실상 폭로는 서지현 검사를 필두로 최영미 시인, 김지현, 송하늘, 홍선주까지 이어지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들 뿐인가. 정 ·재계는 물론이고 방송계, 예술계 너나할 것 없이 더 이상 성폭력을 참지 않겠다는 이들의 결단력 있는 행보가 줄을 잇고 있다. 여기에 더해 작금의 사태가 폭로에 그치지 않고 본질적 문제 해결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성폭력 앞에 왜 많은 이들이 묵인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는지, 피해자가 도리어 숨어야 했던 사회적 통념과 잘못된 인식들은 어떻게 해야 바뀔 수 있을 것인지 성폭력 사태의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여다본다.-편집자주
[뷰어스=문서영 기자] 지난해 가장 많이 읽힌 책 ‘82년생 김지영’에서 소설 속 김지영의 면접관은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이 거래처 미팅을 나갔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래처 상사가 자꾸 좀, 그런, 신체 접촉을 하는 겁니다. 괜히 어깨도 주물주물하고, 허벅지도 슬쩍슬쩍 만지고, 엉? 그런 거? 알죠?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김지영씨부터”
소설 속 김지영은 “그 자리에서 주의를 준다”와 “내가 잘못한 부분은 없는지 돌아보겠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한다”는 어중간한 입장을 내놓는다. 현실의 우리와 다를 바 없다.
지난해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 건수만 2000여 건에 달한다. 각계 각층, 다양한 직업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성희롱, 성추행 등 성폭력을 경험했고, 대다수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왜 그들은 말할 수 없었을까.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서” “말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서” 등 이유와 수치만 나오는 통계가 아닌 현실 속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시민들을 만났다. 그리고 시민들의 사례를 통해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김보화 책임연구원이 각 사례에 맞는 조언을 해줬다. 다만 사후 대처에 대한 조언으로 제한했다. 자칫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멍에를 씌울까봐서다. 김 연구원은 “피해 순간의 예방법, 대처법을 정해둘 경우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네가 대처를 제대로 못해서 이런 지경이 되지 않았냐’ ‘왜 그때 이렇게 못했냐’고 피해자를 몰아가는 인식이 확산될 수도 있다”면서 “성폭력은 미리 예방하거나 막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가장 좋은 대처법은 가해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란 말도 있다. 상황에 따라 다르기에 피해를 당한 그 순간, 가장 좋은 대처법이란 없다는 것을 꼭 생각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진=tvN '이번 생은 처음이라' 방송화면)
■ M씨(여·34·11년차 직장인)
"학연 지연으로 만나게 된 업계 대선배가 있었다. 굉장히 젠틀했고 업계에서도 성과로나 인성으로나 찬사가 쏟아지는 분이었다. 간혹 만나 식사를 할 때 해주는 이야기들은 모두 뼈가 되고 살이 됐다. 그런데 한 세 번쯤 만났을 때였나. 포차에서 술을 마신 뒤 노래방에 가자더라. 단 둘 뿐인지라 걱정됐지만 평소 봤던 선배의 인격을 믿고 노래방에 갔다. 볼에 뽀뽀를 하더라. 경악했다. 만취해서 이런 건가 싶었는데 분위기가 묘했다. 결국 급한 일이 생긴 척 자리를 떴다. 어찌어찌 자리를 뜨는 것 역시 그가 만취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대처했나요? 다음날부터 연락을 일절 하지 않은 게 대처라면 대처였다. 그로부터 2년쯤 후 회사 인근 카페에서 마주쳤다. 새카만 신입들과 같이 있으면서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정말 한 대 쳐주고 싶었다. 그를 멘토 삼아 둘러 앉아 있었을 신입들 앞에서 “그때 왜 저한테 뽀뽀를 하셨습니까?”라고 일갈하고 싶었지만 그 역시 못했다. 업계의 대선배를 기분 나쁘게 해봤자 안 좋은 평판을 얻게 되는 건 나일 게 자명했다. 성폭력 피해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떠올릴 때마다 당시와 똑같이, 기분 나쁘다.
전문가 조언 : 개인적 사과를 받고 싶다면 내용증명을 보내는 방법이 있다. 강제 추행으로 형사 고소도 가능하다. 2013년 6월 이후(친고죄 폐지) 피해라면 고소 기간이 없기 때문에 고소를 고려할 수 있다. 성폭력은 근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기에 피해자 본인의 진술이 가장 큰 증거로 효력을 발휘한다. 그 상황이 같이 본 사람이 있다거나 증언할 사람이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고소가 가능하다.
■ L씨(여·31·4년차 직장인)
"첫 직장이 40~50대 남성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 당시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한번은 술자리에서 남자친구 얘기가 나왔다.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냐” “잘해주냐”는 일상적 질문에 답하다 보니 어느새 술자리는 나와 남자친구의 잠자리를 거론하는 자리가 되어 있었다. 당사자인 나는 생각지도 않고 심지어 체위까지 이야기하며 자기들끼리 신이 나 있었다. 정말 수치스러웠다."
어떻게 대처했나요? 한마디도 못했다. 워낙 성격이 내성적이기도 하지만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버럭 화를 내도 “심했다. 미안하다” 사과할 사람들은 없어보였다. 술자리에서 진지하게 화를 내봤자 손해인 건 나일 것 같았다. 수치스러운 안주 거리가 되면서도 끝내 아무 말도 못했다.
전문가 조언 : 회사의 경우 사내에 마련된 고충처리위원회 등 부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모든 회사가 성폭력예방지침을 갖추고 있다. 다만 사내 마련된 부서가 피해자가 불이익을 당하거나 또다른 모욕 등 2차 피해를 받지 않도록 단단한 신뢰가 구축돼 있어야 한다. 모욕, 성희롱 등으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도 가능하다.
(사진=SNS 캡처)
■ P씨(남·37세·12년차 직장인)
"거래처에 나보다 직급이 높은 여자임원이 있었다. 업무상 자주 만나게 됐는데 어느 날 선배와 함께 여자 임원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됐을 때였다. 그 임원은 “얼굴 좋아보이네”라고 근황을 물으면서 “아내 말고 다른 여자 생긴 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위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해댔다. 거래처 남자 둘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걸 위시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친화력이 좋다는 걸 강조하려고 저러는 건가 이해해보려 했지만 며칠 동안 기분이 나빴다."
어떻게 대처했나요? 함께 있던 선배에게도 “기분 나쁘다”고 얘기했지만 선배 역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라”고 말했다. 만약 그 자리에서 그 발언이 기분 나쁘다고 말했다 하더라도 상대는 농담이었다며 나를 예민한 사람으로 몰고 갈 게 뻔했다. 특히 남자는 희롱에 가까운 발언이 나왔을 때 오히려 대담한 척해야 하는 문화가 있다. 결국 일언반구 못했다.
전문가 조언 :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거래처 사람에게도 회사를 통해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직장 내가 아니라 작장 외의 경우도 성희롱과 관련된 구제법을 참고할 수 있다. 성희롱관련법을 통해, 또는 사내 성희롱예방지침을 통해 상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방법이 있다.
■ H씨(여·26세·3년차 직장인)
"신입사원 때였다. 작은 회사였는데 회사 대표실에 남성 성기 모양 조형물이 두 개가 있었다. 무려 성인 여성 키만큼 컸다. 문제는 자주 대표실로 불려갔다는 것이다. 대표가 업무와 관련돼 이런저런 얘기를 할 때 조형물에만 신경이 갔다. 50대 남성인 대표와 그 방에 단둘이 있을 때마다 조각상 때문에 심리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어떻게 대처했나요? 대표가 좋아서 둔 걸 신입인 내가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나중에 회사 선배에게 말해서 선배를 통해 치우긴 했는데 3달 가까이 정말 수치스러웠다. 가끔 사무실에 오는 중년 남성들이 그 조각상을 보면서 야한 농담 주고받는 것까지 다 들렸다. 참고 참다가 회사를 나왔다.
전문가 조언 : 회사 내 고충처리위원회가 있다면 상담을 통해 해결해달라고 청할 수 있겠지만 이처럼 규모가 작은 회사의 경우 사내성폭력예방지침의 효용도가 떨어질 수 있다. 주변인이나 대리인을 통해 시정조치한 것은 현명하다. 형사상으로는 모욕죄라든지 이런 방식으로 고소하는 방법도 있지만 작은 기관일 경우 말을 꺼냈다가 일하는 게 부담되거나 어려울 수 있다. 만약 성폭력 피해를 입었을 때 회사 규모가 작아 목소리를 낼 곳이 없다면 고용노동부, 국가인권위원회를 통해 제소가 가능하다.
(사진=네이버 화면 캡처)
※ 전국에 180여개 성폭력상담소가 있고 여성가족부 1366을 통해서도 성폭력 피해 상담이 가능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김보화 책임연구원은 피해가 발생했을 때 본인의 상황에 맞는 해결방안, 처리 방안에 대해서 전문가들의 의견과 상담을 받고 얘기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조언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발간한 ‘보통의 경험’이란 책도 추천했다. 이 책은 피해자들의 다양한 피해사례와 더불어 피해 이후에 어떤 과정을 거칠 수 있는지 어떻게 대처가 가능한지 등을 자세하게 안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