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기부 문화는 아직 일상으로 자리 잡고 있지 못하고 있다. 영국자선지원재단(CAF)이 발표한 ‘세계기부지수 2017’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부참여지수 순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21위며, 전체 조사 대상국 139개국 중에서는 62위에 이름을 올리는 데 그친다. 일상이 아닌 기부는 특별한 행위로 인식된다. 이는 곧 기부에 대한 부담을 알게 모르게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부 문화는 다르다. 기부의 부담은 줄이고 행위의 즐거움을 강조한다. 기부가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 새롭게 형성된 기부 문화를 살펴봤다. -편집자주-
(사진=연합뉴스)
[뷰어스=노윤정 기자] 기부를 즐기면서 한다? 우리 사회 기부문화가 변화하고 있다.
최근 지난 2014년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던 아이스버킷 챌린지(Ice Bucket Challenge)가 다시 부활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는 루게릭병 환자들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고 기부금을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규칙은 간단하다. 우선 얼음물을 뒤집어쓴다. 이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온라인상에 올리며 캠페인에 동참할 세 사람을 지목한다. 지목된 사람들은 24시간 안에 얼음물을 뒤집어쓰거나 일정 금액(100달러)을 기부하면 된다. 이후 다음 참여자 3명을 또 다시 지목하는 방식으로 기부와 캠페인에 대한 관심을 이어간다. 특히 최근 다시 시작된 아이스버킷 챌린지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s/SNS)가 더욱 활성화된 환경 속에서 출발점이던 4년 전보다 더 큰 파급효과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참여자들이 캠페인에 동참하는 것 자체를 무척 즐기는 모습이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얼어붙었던 대중의 기부 심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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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꽁꽁 언 기부심리, 팽배해진 불신
2017년 연말 기사에 자주 등장한 단어가 있으니 바로 ‘기부포비아’다. ‘기부’와 공포증을 뜻하는 ‘포비아’(Phobia)의 합성어로, 기부를 꺼려하는 심리상태를 이른다. 거리 곳곳에서 구세군의 종소리가 들려오고 자선냄비를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계절이었다. 매년 연말연시면 도움이 필요한 곳에 온정의 손길이 이어졌다. 하지만 불안정한 경기와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사건, 불우아동 기부금을 횡령·유용한 새희망씨앗 사건 등 일련의 사건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부에 선뜻 나서지 못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부’라고 하면 자선단체를 통한 후원 방식을 많이 떠올리는데, 단체에서 후원금을 유용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며 자선단체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한 것이다.
기부 행위가 위축되고 있는 현상은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통계청의 2017년 사회조사 데이터(전국 25,704 표본가구 내 상주하는 만 13세 이상 인구 약 39,000명 대상, 조사대상 기간 2016.5.16.~2017.5.15.)에 따르면 한 해 동안 기부를 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2011년 36.4%에서 26.7%로 감소했다. 향후 기부 의사가 있다고 답한 사람 역시 41.2%에 불과했다. 2011년 45.8%에 비하면 크게 하락한 수치다.
(사진=연합뉴스, 트리플래닛 홈페이지, 워너원 인스타그램)
■ 퍼네이션, 나눔이 즐거워지다
유독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채 시작되기도 전, 가수이자 승일희망재단 공동대표인 션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뜨렸다. 그는 지난 5월 29일 자신의 SNS 계정에 “2009년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박승일 농구선수를 만나고 그가 꿈꾸던 대한민국 첫 번째 루게릭요양병원 건립을 돕겠다고 약속했다”며 “박승일선수를 만난 지 10년 되는 2018년 올해 드디어 승일희망재단은 박승일 선수 그리고 많은 루게릭병 환우분들과 가족분들이 꿈꾸던 대한민국 첫 번째 루게릭요양병원 건립에 한발자국 다가갈 수 있게 됐다. 2018년 4월 27일 승일희망재단에서 루게릭요양병원이 건립될 토지를 구입하게 됐다. 이제 그 토지 위에 하루 빨리 벽돌 한 장씩을 쌓아 올려 승일이의 꿈을 함께 이뤄주고 싶다”는 글을 게재했다. 이와 함께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영상을 공개하며 다시 한 번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시작했다. 그 파급 효과는 대단했다. 현재 많은 유명인들은 물론, 유명인들의 팬, 일반인들까지 적극적으로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전통적인 기부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의 기부다. 기부자에게 부담도 없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때문에 아이스버킷 챌린지는 ‘퍼네이션’(Funation)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새로운 기부문화로 언급되는 퍼네이션은 재미(Fun)와 기부(Donation)가 결합된 신조어다. 말 그대로 재미를 느끼면서 기부에 동참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퍼네이션 문화는 기꺼이 나눔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 방법을 몰랐던 사람들, 기존의 기부·자선 방식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이 기부에 좀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퍼네이션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부터 세이브더칠드런에서 매년 진행해온 ‘신생아 살리기 모자 뜨기’ 캠페인이나 이용자들의 걸음 수만큼 일정 금액의 후원금이 쌓이는 ‘건강기부계단’, 스마트폰으로 금전적 부담 없이 간편하게 나눔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기부 애플리케이션(앱) 등이 퍼네이션에 속한다. 일상 속에서 접근이 쉽고, 즐기면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최근 기부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유명인들이 적극적으로 선도한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인지도 있는 인물이 자신의 기부 행위를 노출함으로써 대중의 동참을 유도하는 것이다. 아이스버킷 챌린지는 많은 스타들뿐만 아니라 스타의 팬들까지 캠페인에 참여했다. 그런가 하면 배우 이민호는 지난 2014년부터 직접 고안한 사회공헌 기부 플랫폼 ‘프로미즈’(PROMIZ)를 통해 팬들과 꾸준히 선행을 이어오고 있다. 방탄소년단은 지난해 11월부터 ‘러브 마이셀프’(Love Myself) 캠페인을 통해 유니세프의 아동·청소년 폭력 방지 캠페인 ‘엔드 바이올런스’(# END violence)를 지원하고 있다. 팬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지난 5월 31일 기준 방탄소년단과 소속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가 기부한 5억 원을 포함해 총 11억 5460만원이 모였다. 배우 손호준과 유연석도 지난 3월부터 퍼네이션 프로젝트 ‘커피프렌즈’ 이벤트를 진행하며 매달 기부 커피차에서 직접 만든 음료를 제공하고 있다. 연말에 수익금 전액을 기부할 예정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나눔 문화가 위축된 상황에서 다른 방식의 기부가 성행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장윤주 아름다운재단 연구교육팀장은 “작년의 사건들은 정말 진정성 있고 투명하게 운영되는 기부단체의 신뢰까지 떨어뜨리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법은 이런 일을 막을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정작 행정에서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해 발생한 사건이기도 하다”고 사회 전반에 자선단체에 대한 불신이 커진 현실을 지적했다. 더불어 “제도와 행정의 보완도 필요하겠지만, 의미 있고 재밌는 그리고 사회에 정말 필요한 의제에 공감 가는 좋은 기부 사례들이 많이 나와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새로운 형태의 기부 문화에 긍정적인 평가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