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한빛 PD가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노동 실태를 고발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지 2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드라마 스태프들은 관행이라는 이름하에 정당한 임금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잠잘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폭력적인’ 노동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다. 드라마 제작 현장에 여전히 만연한 병폐와 건강한 드라마 산업구조를 만들기 위한 변화의 움직임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사진=Pixabay, 추혜선 의원실)
[뷰어스=노윤정 기자] 지난 7월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방송업’과 ‘영상·오디오 기록물 제작 및 배급업’이 노동시간 특례업종에서 빠졌다. 드라마 제작 스태프들이 개정안에 포함된 '주 52시간 근무제'의 적용을 받는다는 의미다. 이는 드라마 제작 스태프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변화다. 이제 드라마 제작사들은 규모에 상관없이 모든 사업장에서 주당 68시간을 초과해 근무할 수 없다. 또한 사업장 규모에 따라 내년 7월부터 순차적으로 주 52시간 근무제를 적용해 나갈 예정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아직도 ‘관행’이라는 이름하에 스태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난 10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정의당 추혜선 의원은 ‘10월 방영드라마 촬영일지’를 공개했다. 해당 일지에 따르면 KBS2 ‘오늘의 탐정’은 일주일 간 총 73시간, 하루 평균 18시간 동안 촬영했다. JTBC ‘뷰티 인사이드’는 일주일 중 나흘을 촬영하며 총 78시간을 찍었고 하루 근무 시간이 20시간을 넘긴 날이 사흘이나 되었다. 근로기준법 개정안 시행 이후에도 드라마 제작 스태프들은 여전히 장시간 근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명목상이나마 주 68시간 근무제를 지키는 곳도 스태프들의 근무 스케줄을 특정 일에 모는 경우가 많아 노동 조건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대부분 턴키 계약(Turn-key)을 맺고 있는 스태프들은 몇 시간을 일하든 같은 임금을 받는 터라 추가 근무 수당도 없다.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봐도 체감 가능한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미니시리즈 드라마에 스크립터로 참여 중인 A씨는 근로기준법 개정 이후 현재 작품에 들어갔다. 초반에는 예전과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기도 했으나 방송이 시작되자 역시나 빠듯한 스케줄을 따라가기에 바빴다. A씨는 “방송 시작하기 전에는 그래도 하루 15~16시간 정도 찍고 늦게 끝나면 다음 날 늦게 출발하는 식으로 융통성 있게 진행했는데 첫 방송이 다가오고 찍을 것들이 많아지면서 그런 노력들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같다”고 전했다. 스태프들이 느끼기에 장시간 노동이라는 악습을 근절하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사진=KBS1 방송화면)
■ "어렵지만 바뀌어야"…제작사들, 주 52시간 근무제 발맞춘 변화 움직임
드라마 제작 현장이 변하려면 제작사의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 정부가 스태프들의 노동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나섰으니 제작사들도 보조를 맞추려는 모양새다. 물론 생방송처럼 타이트한 일정하에 드라마를 만들어내야 하는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 문제를 단 번에 뿌리 뽑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제작사들 역시 법의 취지에 공감하며 조금씩 변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사전제작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는 B사 관계자는 “준비를 많이 하면 할수록 현장에서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대본을 많이 뽑아놓은 상태에서 촬영을 나가려고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획을 탄탄히 한 다음에 촬영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현장에서 쓰는 비용도 줄일 수 있고 촬영 횟수 같은 것들도 좀 더 조절이 가능하다. 대본을 많이 뽑는 것도 기획을 탄탄히 하는 과정 중 하나다. 대본이 많이 나오게 되면 신들을 모아서 촬영할 수 있지 않겠나”고 덧붙였다. B사의 작품은 사전제작 드라마다 보니 시간적인 면에서 여유를 가지고 제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 주말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C사의 연출자는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맞춘 가이드라인을 최대한 따르려고 노력 중이라고 강조했다. 이전보다 비용적인 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정해진 근무 시간을 어기지 않기 위해 다 같이 애쓰고 있다는 설명이다. C사 연출자는 “하루 촬영을 나가도 전만큼 촬영 분량을 소화하진 못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촬영 회차가 늘어나고 제작비도 증가하고 있다. 그래도 스태프들과 수시로 소통하며 가이드라인을 따르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부터 적용되는 주 52시간 근무제에 대해서는 아직 대비하지 못했다고 솔직하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C사 연출자는 “아직 68시간에 맞춘 가이드만 잡고 진행하고 있다”며 “주 52시간 근무제의 적용을 받는 시기가 되면 그만큼 사전제작 하는 기간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처럼 당장 주 68시간 근무 시간 기준을 맞추기도 빠듯하기에 내년 일까지 신경 쓰기 어려운 것이 현재의 드라마 제작 현실이다.
‘친애하는 판사님께’ 부성철 PD는 제작발표회 당시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에 대해 “참 힘들더라. 사람이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서 그런 법이 제정됐지만 만드는 입장에서는 너무 힘들다. 그래도 (정해진 근무 시간을)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노동시간 규제와 함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대책들이 함께 나와주지 않는다면 제작 현장에서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스태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드라마 제작 현장 분위기는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한편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방책을 함께 고심해야 한다.
(사진='드라마 세이프 1인 캠페인' 벌이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관계자/연합뉴스)
■ 시급한 문제는? 사전제작·러닝타임 축소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문제들은 무엇이 있을까. 주 52시간 근무제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일단 사전제작 드라마의 편수가 증가해야 한다. 사전제작 드라마의 경우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촬영부터 후반 작업까지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스태프들이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지 않아도 되고 작품의 퀄리티도 높일 수 있다. 때문에 쪽대본, 생방 촬영이 문제시될 때마다 늘 사전제작 시스템 도입이 함께 화두에 오르곤 했다.
하지만 제작사들이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사전제작 드라마를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자금 문제 때문이다. 사전제작을 할 경우 제작 기간이 길어지는 만큼 자연히 제작비가 상승한다. 또한 그렇게 막대한 비용을 들여 작품을 만들기에는 작품의 흥행 여부나 방송사 편성 가능 여부를 알지 못한다는 위험부담도 있다. 방송사 편성을 받지 못하면 제작사 입장에서는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발전차 기사인 D씨는 “자본 구조가 탄탄한 제작사가 (시간과 인력 운용 등에) 여유를 갖고 제작하는 게 정답이라고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보다 더 시급하고 본질적으로 시정되어야 하는 문제는 주 2회, 120분 편성 시스템이다. 현재 지상파 3사의 주중·주말 미니시리즈는 광고 시간 제외 60분 분량으로 일주일에 두 편씩 방송되고 있다. 그나마도 지난 7월 근로기준법 개정 이후 지상파 3사가 모여 광고 포함 67분에서 광고 제외 60분으로 협의를 본 것이다. 케이블·종편 드라마의 경우 한 편당 최대 90분 간 방송되기도 한다. 주당 120분씩 방송 분량을 만들어내는 현재 시스템이 익숙한 시청자들은 문제점을 잘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으나 주 2회 편성이야 말로 스태프들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시청자들은 좋아하는 드라마의 편성 시간이 길어지면 기쁠지 모르나 드라마를 만드는 스태프들은 10분 분량을 더 만들어내기 위해 하루 더 밤을 새야 한다.
가까운 일본이나 드라마 산업이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한 곳인 미국만 보더라도 대부분의 작품이 40~50분 분량으로 주당 한 회만을 편성한다. 스크립터 A씨는 “오늘 찍어 내일 방송을 내보내야 하는 환경 속에서는 지금 당장 바뀔 수 있는 게 없다고 본다”며 “기본적으로 방송 시간이 너무 길다. 이것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너무 많은 분량을 찍다 보니 물리적인 시간 자체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탁종열 소장 역시 드라마 제작 스태프들의 강노 높은 노동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최소 3개월 이전에 조기 편성이 이뤄져야 한다. 100% 사전 제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한 제작 기간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한편 "드라마 편성 시간도 1주 2회 회당 50분 이내로 줄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방송사와 제작사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업계를 골병 들게 하는 병폐를 ‘드라마 판은 원래 다 이래’라고 생각하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 이런 인식의 전환 아래 대본을 조기에 확보하고 촬영 초기부터 A-B팀을 운영하며 제작인원을 확충하는 등 실질적으로 스태프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가장 기본적인 근로시간을 준수하고 일한 만큼 임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법적인 제재를 떠나 노동자로서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지키려는 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