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스타트업얼라이언스)

벤처·스타트업 관련 커뮤니티나 SNS를 둘러보면 “벤처(Venture)는 모험이라는 뜻인데, 왜 우리나라 벤처 캐피탈들은 안정만을 추구하나?”라는 주제의 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글을 올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실제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도 많으니 내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벤처캐피탈이 모험 자본으로 불리는 것은 전통적 투자 자산인 상장 주식이나 채권 대비 고위험(High Risk), 고수익(High Return) 상품인 비상장 벤처·스타트업 주식에 투자하는 것으로 이미 달성이 된 것이지, 굳이 리스크가 더 큰 기업을 골라서 투자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의 창업 5년 후 생존률은 30%를 밑돈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스타트업의 70%는 5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업하는 것이 평균이라는 말이 된다. 이런 판에 돈을 투자하면서 보다 안정적인 기업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투자자가 좋은 투자자라고 할 수 있을까?

출자자(LP, Limited Partners)들이 믿고 맡겨 준 소중한 투자금을 면밀한 검토 없이, ‘그냥 잘 될 것 같다’라는 감이나 '믿어 달라’는 읍소에 기반해 투자하는 건 LP들에 대한 신의성실을 위반하는 행위지 절대 올바른 일이 아니다.

벤처·스타트업 투자 의사결정이 창업자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닌 철저한 분석과 검증의 과정을 통해 얻어낸 논리적 신뢰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벤처캐피탈이 조성한 운용기간 7~8년짜리 블라인드 펀드에 담기는 기업의 수는 10~15개를 넘지 않는다. 이 펀드의 투자 기간이 3년이고, 펀드를 운용하는 심사역이 3명이라고 가정해 보자. 해당 심사역들이 1년에 최소 100개 기업은 만날 테니 본 펀드는 어림잡아도 ‘100 X 3 X 3 = 900’, 즉 900개의 기업 중 10~15개만 선발해 투자하는 펀드가 된다. 1.7%가 안 되는 확률의 선발 과정이 치열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1년에 100여개 기업 중 3~4개를 선별해 투자하는 VC 심사역에게 고위험이란 이런 상황을 말한다.

① 아직 극초기 단계여서 회사가 일정수준 이상의 성과를 달성할 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은 경우
② 투입되어야만 하는 비용 대비 성과의 크기가 불확실한 경우
③ 회사의 사업이 특정 파트너사에 너무 의존하고 있어 그들의 의사결정에 휘둘릴 수 있는 경우
④ 산업 내 규제적 회색지대가 존재해 정책 변동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경우

이런 상황임에도 이에 대응되는 고수익이 클 것으로 기대된다면 투자를 하고, 만약 다소 애매하지만 투자는 하고 싶다면 기업가치(Value)를 깎아서 다소 인위적인 고수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아래의 사항은 고위험이긴 하지만 그에 대응되는 고수익을 창출해 내지 못하는, 그냥 문제점일 뿐이다.

① ‘~할 것이다’라는 계획만 있고 그 어떤 실행도 하지 않고 있는 상황(투자받으면 할거예요)
② 시장성을 검증한 데이터 없이(혹은 데이터가 시장이 없음을 이미 말해주고 있는데도) 투자를 받아 마케팅을 태우면 팔릴 것이라고 근거 없이 주장하는 상황
③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의 핵심인력을 전혀 내재화하지 못한 인력구성(투자 받으면 뽑을거예요)
④ 배임/횡령 소지가 다분한 재무·회계 운영
⑤ 핵심사업 없이 그때 그때 돈 되는 프로젝트에 투입되고 있으며, 매년 수주 상황에 따라 출렁이는 매출 구조

이러한 기업에 투자하지 않는다고 “우리나라 VC들은 리스크를 전혀 감내하지 않는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경험 상 블라인드 펀드 1개에 담기는 10~15개 기업 중 3분의 2 가량은 투자 시점 대비 크게 기업가치를 올리지 못하거나, 심할 경우 망해서 감액 처리된다. 나머지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업만이 “사업 잘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의 성과를 내고, 그 중에서도 최상위 1~2개 회사만이 소위 대박이 나서 펀드 수익률을 홀로 끌어올리는 것이 현실이다. 안정만을 추구한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까다롭게 고르고 골라도 결과가 이러하다.

초기창업기업이 상장 기업과 같은 체계와 시스템을 갖출 수 없음은 당연히 감안을 해야 한다. 하지만 업력에 기인한 문제가 아닌, 사업성이나 경영능력 부족으로 인한 고질적인 문제는 철저히 검증해서 피해야만 한다. 만일 국민연금이 국민들의 피 같은 연금을 위험한 초기 비상장기업에 검증 없이 창업자의 의지와 말만 믿고 척척 투자해준다면 칭찬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벤처캐피탈은 민간 중심의 서구권과는 다르게 정부 주도형으로 성장했다. 그렇기에 규제의 영향을 많이 받고, 행정 절차도 복잡한 편이어서 창업가 입장에서는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 간다 해도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나 즉시 투자를 결정하는 투자자는 ‘Entrepreneur Elevator Pitch’ 같은 TV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는 점은 인지했으면 한다.

VC 투자는 로켓에 올라타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행위와 같다. 만약 아직 로켓이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로켓을 만드는 팀의 역량과 로켓 제작에 적용된 기술력을 보고 돈을 지불하는 것이지, 돈을 주면 그때부터 로켓을 만들 거라고 외치는 사람에게 흔쾌히 돈을 지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종이에 써진 계획만 보고 수십~수백억을 투자했던 사람들이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 몇 년 전 ICO(Initial Coin Offering) 광풍을 통해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는가.


■ 유지윤 팀장은 현재 벤처투자회사(VC) 라이징에스벤처스에서 투자심사역으로 재직 중이다.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및 동 대학원 글로벌경영학 석사(MBA)를 마쳤다. LG상사(現 LX인터내셔널) 금융팀과 기획팀을 거쳐, 게임 개발 스타트업 플라이셔에서 사업팀장을 역임했다. 이후 벤처캐피탈리스트로 커리어를 전환, 현재 기술 기반 초기창업기업 전문 VC인 라이징에스벤처스에서 다수의 벤처투자조합을 운용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