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깃발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 유럽이 멈춘 건 속도, 방향은 그대로
유럽이 기후·ESG 규제의 ‘속도 조절’을 택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 공급망실사지침(CSDDD) 등 핵심 제도를 일부 완화하거나 시행을 연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일시적 숨 고르기일 뿐, 방향 전환은 아니다. 유럽연합(EU)은 여전히 탄소비용 부과와 ESG 공시 확대를 통한 지속가능한 전환을 정책의 기본 기조로 유지하고 있다.
지난 2020년 EU는 탄소중립(2050 Net-Zero) 달성을 위해 강력한 기후·ESG 규제 도입을 본격화했다. 이것은 업계, 비용 증가와 공급망 관리 부담이 전망됐다. 2023년 규제의 본격 시행이 예고됐으나 2024년 초, 유럽 산업계는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와 에너지 가격 상승 속에서 “규제 강행 시 유럽 경쟁력 붕괴”를 우려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 옴니버스 패키지, 뭐가 달라지나?
EU 집행위는 ‘옴니버스 패키지’를 통해 속도 조절을 선언했다. 옴니버스 패키지에는 아직 보고를 시작하지 않은 회사에 대한 CSRD 적용을 2년 연기하고, CSDDD의 전환 및 적용을 1년 연기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지난 2월 집행위원회가 옴니버스 패키지를 제안한 이후, 3월 EU 이사회, 4월 유럽의회를 거쳐 오는 10월 최종 표결만 남겨둔 상황이다.
옴니버스 패키지의 핵심은 기업의 규제 부담을 줄이되, ESG 전환의 큰 방향은 유지한다는 것이다. CSRD는 기존에는 연매출 4000만 유로, 자산총액 2000만 유로, 직원수 250명 초과 기업을 대상으로 ESG 공시를 의무화했지만 이번 개정으로 기준이 대폭 상향(직원 수 1000명 이상, 순매출 5000만 유로 또는 자산 2500만 유로 초과 기업)된다. 이에 따라 유럽 내 ESG 공시 의무 기업은 약 5만개에서 1만개로 줄어들 전망이다.
■ 대상 기준 상향…중소기업은 자발적 공시만
중소기업은 자발적 공시로 대체해 협력업체가 대기업에 ESG 정보를 과도하게 요구받지 않도록 한다. 2026년부터 도입 예정이었던 업종별 공시 기준(섹터별 ESRS)은 폐지돼 공시 기준이 단순화된다.
CSDDD도 기업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수정됐다. 기존에는 모든 협력업체를 대상ㅇ로 하던 것이 1차 협력사로 축소된다. 다만 NGO나 언론 보도를 통해 간접 협력사의 ESG 리스크가 명백히 드러날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심층평가를 해야 한다.
‘협력사 계약해지’ 의무가 사라져 공급망 ESG 리스크가 발견돼도 바로 거래를 끊을 필요는 없다. 대신, 기업이 ‘강화된 예방 실행계획(Enhanced Prevention Action Plan)’을 마련해 개선 노력을 충분히 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실사 주기도 완화됐다. 기존에는 연 1회 ESG 실사 결과를 점검해야 했지만, 앞으로는 5년마다 한 번씩 적절성을 평가하면 된다. 단, 환경·인권 리스크가 발생하거나 기업 구조조정, 신제품 출시 등 경영상 변화가 있으면 즉시 실사를 해야 한다.
기존에는 2030·2050년 감축 목표와 세부 실행계획까지 의무였지만, 이제는 기후전환 계획을 세우는 것까지만 의무고, 이행 여부는 기업의 자율에 맡긴다.
■ 규제 완화 아닌 ‘재설계’…기업 대응 필요
기존에는 ESG 위반 시 전 세계 매출의 5%까지 벌금을 부과할 수 있었지만, 이번 개정으로 벌금 상한이 삭제되고, 각국이 자율적으로 벌금을 정하도록 했다. 민사책임 조항도 완화됐다. 과거에는 노동조합이나 NGO가 집단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각국 법률에 맡기고 집단소송 조항은 삭제됐다.
CBAM는 큰 틀에서 유지된다. 다만, 운영 방식은 보다 현실적으로 보완되고, 적응 기간도 늘어난다. CBAM의 본격적인 탄소비용 부과는 2026년부터 시행 예정이다.
EU는 기업 부담을 고려해 규제 속도를 조절했지만, 탈탄소와 ESG 전환이라는 큰 흐름은 그대로 유지된다. 유럽의 규제 환경은 완화가 아니라 ‘재설계’의 단계에 있다. 한국 기업들도 방심할 수 없다. 재생에너지 전환, ESG 데이터 관리, 공급망 점검은 여전히 필수다. 전문가들은 “유럽이 숨을 고른 지금이 대응 전략을 정교화할 시간”이라고 조언한다. 더 큰 파고는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