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 전 금융감독원장이 2025년 2월 27일 서울 종로구 생명보험교육문화센터에서 열린 보험회사 최고경영자(CEO)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당시 이 원장은 삼성생명의 삼성화재 자회사 편입 승인 신청과 관련, "실질적 의미의 지배구조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며 회계 변화 필요성을 일축했다.(사진=연합뉴스)
행동경제학에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s)’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닻내림 효과’인데요. 닻을 내린 배가 닻 주변을 벗어날 수 없듯 처음 접한 정보에 얽매여 합리적 선택에 지장이 생기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백화점 명품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면 대부분 예상했던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점원으로부터 듣게 됩니다. ‘200만원 정도 하려나…’ 짐작했는데 1000만원이라는 충격적인 가격을 듣는 거죠. 깜짝 놀란 고객에게 점원은 다음 단계로 디자인이 조금 다른 800만원짜리 제품을 보여줍니다. 그래도 고객이 망설이면 마지막이라는 듯이 500만원대 제품을 소개합니다. 디자인만 약간 다르고 품질은 비슷해 보이는데 가격이 10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확 낮아지니 고객은 아주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느낍니다. 처음 접한 1000만원이라는 가격이 기준점(앵커)이 돼 실제로는 합리적이지 않은 가격(500만원)을 매우 합리적인 가격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명품 매장에서 초고가 상품을 진열하는 것은 반드시 팔겠다는 목적보다는 주력 판매 상품을 싸 보이게 만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삼성생명 회계처리 문제를 보면 ‘앵커링 효과’를 떠올리게 됩니다. 똑똑하고 합리적인 전문가들이 처음 본 숫자(정보)에 매몰돼 평정심을 잃고 앵커 주변에서 최선이 아닌, 차선(또는 차악)을 선택하며 안도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500만원 명품이 싸보이는 이유, '앵커링 효과'
2022년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2023년 새로운 회계제도 시행을 앞두고 삼성생명 회계팀은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국제회계기준(IFRS17)의 특징인 ‘보험부채의 시가평가’와 ‘보험수익의 발생주의’를 적용한 결과 큰 탈 없이 회계정책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풀기 어려운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계약자지분조정’입니다.
삼성생명은 1993년 이전까지 유배당 보험상품만 팔았습니다. 유배당 보험은 계약자가 무배당 보험보다 높은 보험료를 내는 대신, 보험사의 자산 운용 결과 이익이 발생할 경우 보험금 외에 추가적인 자산운용 수익을 배당받기로 약정한 상품입니다. 삼성생명은 유배당 보험 계약자의 보험료를 삼성전자에 투자해 막대한 이익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만 하고 팔지는 않았기 때문에 실현이익이 아니라 평가이익이었습니다. 유배당 보험계약자는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팔아야 배당을 받을 수 있는데 팔지 않으니 언젠가는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고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삼성그룹 총수 일가는 2010년 삼성생명을 상장시키면서 막대한 상장 차익을 거두게 되는데 이 때도 유배당 계약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전혀 없었습니다. 보험 소비자의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팽배하자 삼성생명과 금융당국은 ‘계약자지분조정’을 지렛대 삼아 수습에 나섭니다. 계약자지분조정은 유배당 보험 계약자들의 보험금으로 취득한 삼성전자 주식의 미실현 평가손익 중 계약자에게 배분될 몫을 재무제표상 부채로 표시해 온 계정입니다. 이는 미국의 ‘그림자회계(shadow accounting)’ 관행에서 차용해 온 것으로, 기존 IFRS4 체제에서도 삼성생명만이 도입한 독특한 항목입니다.(관련 기사 : [삼성 민낯①] 회계기준원이 삼성생명 겨냥한 까닭은?)
삼성전자의 주가 상황에 따라 금액이 들쑥날쑥 하긴 했지만, 어쨌든 삼성생명이 재무제표에 보험계약자의 권리를 숫자로 매 분기마다 보여주니 ‘설마 삼성이 떼먹기야 하겠어’란 생각을 갖고 유배당 계약자들은 안심하게 됩니다. 실제로는 공수표, 희망고문이지만 어쨌든 심리적 안정 효과는 컸습니다. 그렇게 잠잠해졌던 이슈는 2023년 새로운 회계제도 도입을 앞두고 수면 위로 재부상합니다.
■ 삼성생명이 유일하게 풀지 못한 숙제, '계약자지분조정'
2022년 삼성생명 회계팀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모든 회계정책을 마무리하고 ‘계약자지분조정’ 문제만 남았는데, 이 문제가 삼성그룹 지배구조와 연결된 것이다 보니 삼성생명 회계 책임자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회계제도 취지와 원칙에 맞게 계약자지분조정 항목을 회계처리 하려면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됐습니다. 하나는 보험부채로 반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으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삼성생명의 현실(실재)을 가장 잘 보여주는 회계처리는 후자였습니다.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에 대한 매각 계획이 전혀 없으니 계약자지분조정 배부액을 연도별 측정해 보험부채로 반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이는 2022년 당시 약 10조원으로 잡혀 있던 계약자지분조정 배부액이 새로운 회계제도에서 갑자기 ‘0’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당시 부장급에 불과한 회계 책임자 입장에선 두려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0조원’을 갑자기 ‘0원’으로 바꾸는 회계처리였으니까요. 그래서 상급자인 임원들에게 사인(결재)을 요청했습니다. 공동책임을 요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임원들도 선뜻 사인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이 문제가 공론화됐을 때 책임을 질 수 있어야 사인을 할 텐데 계약자지분조정 문제는 사실 삼성생명 임원급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사안은 아닙니다. 총수 허락 없이, 삼성그룹 콘트롤타워(사업지원TF) 재가 없이 삼성생명 단독으로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의 매각을 계획하는 것 또한 언감생심이었으니까요.
결국 삼성생명 최고위급이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마침 한국회계기준원(KAI) 비상임위원이었던 이한상 고려대 교수(현 KAI 원장)가 삼성전자 최고위 경영진에게 서신을 보내 “삼성생명이 계약자지분조정을 자본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는 미래에 큰 사회적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상황. 당시 이 교수는 KAI에도 공식 질의서를 제출해 계약자지분조정의 처리방향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KAI는 ‘당사자도 아닌 교수가 왜 이런 문제제기를 하느냐’며 소극적 태도를 보였고, 결국 공은 금융감독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태를 파악한 금감원은 이 교수의 질의서는 철회시키고 삼성생명이 당사자로서 직접 질의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교통정리 했습니다. 그리고 금감원과 KAI, 한국공인회계사회, 학계, 회계법인, 기업 등 총 11명으로 구성된 질의회신 연석회의를 거쳐 2022년 12월 28일 질의회신문을 발표합니다. 삼성생명의 계약자지분조정 유지(일탈회계)를 허용한 그 회신문입니다.
■ 금감원으로 넘어간 공, 허나...
당시 결론 도출 과정을 취재해 보니 초점은 ‘계약자지분조정 배부액 0원만은 막아야 한다’에 맞춰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성생명 회계책임자와 임원들이 그러했듯, 10조원을 갑자기 0원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한 후폭풍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앵커링 효과’로 설명하면 ‘0원’이라는 숫자를 접한 뒤 합리적 사고체계에 교란이 발생한 것이죠. 1000만원이라는 숫자를 보고 나면 500만원도 싸게 보이는 것처럼, ‘0원’이라는 최악의 숫자를 접하고 나니 ‘일탈이든 뭐든 현상 유지만 해도 감지덕지’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새로운 회계제도에 가장 적합한, 최선의 회계처리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막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당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는 0원에 대한 두려움으로 책임 회피의 심리가 팽배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결과 연석회의 선택지는 ①현상유지 ②보험부채 두 개밖에 없었습니다. 삼성생명은 질의문에서 갑설(현행 회계처리 유지)과 을설(IFRS17 보험부채 반영) 두 개를 제시했고, 그 중에 갑설을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삼성생명의 실재(현실)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③안(자본으로 반영)은 아예 선택지에서 빠졌습니다. 금감원과 삼성생명이 사전에 ③안 배제를 합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③안이 선택지에서 배제된 배경을 이해하고 있는 연석회의 참가자들은 자연스럽게 ①안을 지지합니다. ②안을 지지하려면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매각 계획이 제시돼야 하는데 삼성생명은 그럴 계획이 전혀 없다고 하니 선택지가 될 수 없었던 것이죠. 금감원이 최근 비공개로 개최한 삼성생명 간담회에서 '2022년의 금감원 결정에 문제가 없다는 의견이 다수로 제시됐다'는 보도가 나오는 배경입니다. 겉으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 선택지 뿐이었으니까요.
결론적으로 삼성전자와 삼성화재의 ‘밸류업 헛발질’로 촉발된 삼성생명 회계처리 논란이 불거진 현재, 2022년 상황을 복기해 보면 금감원은 두 가지 선택지가 아닌, 세 가지 이상의 선택지를 두고 고민했어야 맞습니다.
새로운 회계제도의 핵심은 보험상품의 모든 계약 및 부채를 원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장래 발생할 현금 유출과 유입을 현재가치로 평가해 부채로 계상하는 것이 가장 상위 원칙입니다. 계약자지분조정 이슈에 적용하면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미래에 매각해 유배당 계약자에게 이익을 배분하려는 계획이 있다면 그것을 보험수리적 가정을 동원해 부채로 별도 인식해야 합니다. 매각 계획이 없다면 자본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보험부채로 반영할 수 없다면 자본으로 반영했어야 하는 것이죠. 취재 결과, 삼성그룹은 유배당 계약자에게 투자 이익을 나눠줄 계획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계약자지분조정을 보험부채로 반영할 수 없습니다. 보험부채로 반영하지 않아 일어날 후폭풍은 금감원이 아닌, 삼성그룹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 자본 전환은 왜 선택지에서 빠졌나
지난 18일 국회에서 열린 ‘긴급토론회’에서 모 교수는 ‘회계는 기업이 하는 것이고 제3자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사안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발언했습니다. 깊이 공감합니다. 회계는 기업이 알아서 하고, 금감원은 원칙에 맞게 감리를 하면 됩니다. 일어나지 않은 후폭풍을 미리 감안해 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특정 기업의 입맛에 맞게 각종 편의를 봐줄 필요가 없습니다. 원칙에 입각해 사안을 처리했는데 그걸 비방할 사람 또한 없습니다.
이번 이슈는 KAI나 시민단체가 먼저 제기한 것이 아닙니다. 삼성그룹 스스로 촉발한 이슈입니다. 2022년과 마찬가지로 금감원은 책임이 두려운 사람들을 대신해 억지로 끌려 나왔습니다. 당국의 존재 이유이자 역할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도 듭니다. 가장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은 삼성그룹 이재용 회장인데 엉뚱한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까요.
어찌됐건 이왕지사 다시 문제가 불거진 삼성생명의 회계이슈인데요. 금감원은 과연 원칙에 입각한 정공법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서도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을까요. 지켜보는 눈이 많은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