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1년 열린 'RE100 모의 경주' 퍼포먼스 (사진=그린피스)
■ ‘기후악당’ 철강·석유화학···산업 온실가스 배출 73% 차지
AI 데이터센터와 철강·석유화학 산업은 온실가스 배출 구조가 전혀 다르다. 전자가 전력 소비 중심이라면 후자는 연료 연소 중심이다. 그러나 배출의 경로가 다른 두 산업은 같은 전력망과 재생에너지라는 희소 자원을 두고 경쟁한다는 점에서 서로 얽힌다.
문제는 철강·석유화학이 구조적으로 이미 ‘기후악당’으로 낙인찍힌 가운데 녹색 전환 과정에서도 재생에너지 확보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이들 전통 장치산업은 온실가스 감축과 무탄소 전력 확보라는 이중고를 떠안으며 AI 전력 폭증의 그림자 속에 더욱 궁지로 몰리고 있다.
2020년 국가 온실가스 인벤토리 기준으로 국내 산업 부문 온실가스 배출은 2022년 약 2억 3890만 톤에 달한다. 이 가운데 철강·석유화학·시멘트 3대 업종이 1억 7930만 톤으로 전체의 73%를 차지한다. 철강만 연간 1억 890만 톤, 석유화학은 6920만 톤을 배출한다.
■ RE100 경쟁 격화, 재생에너지 몫 줄어드는 철강·석유화학
AI 서버실 한 곳은 연간 수십 MW의 전력을 삼킨다. 국내 데이터센터의 AI 전력 수요는 2025년까지 산업용 전력의 5~10%를 추가로 차지할 전망이다. 문제는 철강·석유화학도 저탄소 공정으로 갈수록 전력 의존도가 급격히 높아진다는 점이다. 철강의 수소환원제철과 석유화학의 전기화 NCC는 기존 화석연료 대신 막대한 무탄소 전력을 필요로 한다. 결국 장치산업도 녹색 전환을 위해선 전력 확보 전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내 RE100 가입 기업은 이미 300곳을 넘어섰다. 그러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2030년 21.6%, OECD 평균(34%)에 한참 못 미친다. AI 데이터센터는 RE100 달성을 위해 재생에너지 전력 구매(PPA)를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있어 장치산업이 확보할 몫은 더욱 줄어든다.
■ 정책·인프라 부재 속 맨땅에 헤딩
정부는 AI 제조혁신, 재생에너지 확충, 송전망 고속도로 구축 등을 내세운다. 그러나 4대 전력 다소비 산업(철강·석유화학·반도체·데이터센터)만 해도 2042년까지 21.4TWh의 무탄소 전력이 부족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서울시 전체 전력 소비의 절반에 해당한다. 전력망 확충·무탄소 전력 공급·전력 사용 배분 모두 제자리걸음을 하면 “AI 서버실이 제철소를 집어삼킨다”는 우려가 현실이 된다.
AI와 장치산업은 배출 구조는 다르지만 무탄소 전력이라는 희소 자원에서 반드시 맞붙을 수밖에 없다. 온실가스 감축과 전력망 경쟁이라는 이중 압박 속에서 한국 산업의 녹색 전환은 가장 험난한 길목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