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셀스)

최근 만난 창업자들 중 “요즘 VC들은 AI 아니면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서요?”라고 묻는 분들이 꽤 있다. 반도체나 바이오 등 딥테크 분야는 정부의 산업 육성 의지가 반영돼 상황이 좀 낫지만, 플랫폼·ICT 서비스 등의 섹터에 속한 스타트업들은 이 변화를 더 크게 체감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2024년 글로벌 VC 투자 중 AI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20~30% 수준이고, 일부 통계에선 시장에 따라 30%를 훌쩍 넘겼다고 한다. 아마 2025년 기준으로는 더욱 상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기준으로는 전체 VC 딜의 절반 이상이 AI 연관 회사로 쏠렸다는 분석도 나올 정도로, 벤처투자 시장의 자금이 AI 기업을 선호하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여전히 40~70%의 자본은 비(非) AI 영역에 배분되고 있다. 따라서 “AI 외 분야 스타트업에게는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라는 식의 여론은 과장이 많이 섞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플랫폼·ICT 서비스 분야가 지난 십수 년간 수천억~조 단위의 투자를 유치했음에도 적자를 면치 못하다 침몰한 티몬·위메프, 발란 등의 여파로 투자 유치가 어려워진 것은 맞다. 그렇다고 “요즘 VC들은 AI가 아니면 투자하지 않는다”라고 단정 짓는 것은, 부분만 보고 현실을 호도하는 셈이다.

오히려 우려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요즘은 AI가 핫하니까, AI 요소가 있어야 투자받기 쉬우니까, 사업에 억지로라도 AI를 붙여야 한다”라는 식의 접근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점이다.

현재 투자자들이 AI 섹터에 미래가 있다고 보고 투자를 많이 하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사업의 본질과 무관하게 AI 기업이라는 명패를 얻기 위한 이른바 ‘AI 워싱’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는 점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VC들은 과거 메타버스, 블록체인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의 하이프 사이클을 통해 “핵심 역량이 아닌데 트렌드를 따라 억지로 붙인 사업”이 결국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했다.

코로나 시기, 도대체 왜 주민등록등본 발급을 가상공간에서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각종 지자체가 열을 올려 만들었던 메타버스 서비스들이 지금은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처럼, 블록체인을 쓰지 않아도 똑같은 효과를 훨씬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었음에도 굳이 블록체인으로 코인을 발행해야만 워킹한다고 주장하던 크립토 스타트업들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창업자가 사업의 본질과 무관하게 AI 키워드를 가져다 쓰기 위한 워싱을 한다면, VC 입장에서는 “제품과 고객에 대한 이해보다 자본의 유행을 더 신경 쓰는, 빈 껍데기 같은 사업”이라는 신호로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한 번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면, AI 워싱을 하기 전에는 인정받고 있던 본 사업의 진정성마저도 함께 의심을 사게 된다.

AI 섹터가 아닌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창업자 입장에서 가장 확실한 투자 유치 전략은, 지금 하고 있는 본업을 최대한 선명하고 깊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고객의 이런 문제를, 이렇게 해결해서, 이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다”라는 문장이 명확해질수록, 유행은 중요하지 않아진다.

플랫폼·ICT 서비스 스타트업이라면, 서비스 어디에 AI를 적용해서 ‘AI 스타트업처럼 보일까’를 고민할 게 아니라 고객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낫다. ‘마케팅비를 쓰지 않아도 우리에게 돈을 쓰는 코어 유저’를 확보하기 위해, 앱 방문·결제 빈도와 리텐션을 집요하게 파고 드는 지표 설계를 해야 한다. 여기에 CAC, LTV, ARPU 등 이익 관련 지표를 통해 유닛 이코노믹스가 성립하는 플랫폼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VC들이 “AI 기업이 아니라서” 투자하지 않을 이유는 사실상 없다.

B2B SaaS 등 솔루션형 서비스 스타트업이라면, 솔루션이 적용될 산업의 명확한 페인포인트와, 우리 솔루션을 썼을 때의 ROI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솔루션을 쓰면 인건비·오류·리드타임이 얼마 줄어든다”를 정량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객사들과 어떤 POC를 수행했는지, 의미 있는 유료 고객사를 얼마나 확보했는지까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 역시 AI 기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투자를 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

물론, 서비스 스타트업들은 무조건 AI를 쓰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AI는 ‘핵심 사업을 더 잘하게 해주는 도구’일 때만 설득력이 생긴다. 예를 들어 플랫폼이라면 추천·검색·수요예측, 제조라면 품질 검사·예지보전처럼, 본업에 자연스럽게 붙어서 본업을 더 빛내 줄 때 비로소 AI의 의미가 강화된다.

VC들과 소통할 때는 “AI 기능이 있다”는 말 그 자체보다, “AI를 쓴 결과로 개선된 지표와 원가 구조,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경쟁우위”를 스토리라인의 중심에 두는 것이 좋다. 즉, “우리는 AI 스타트업이다”라는 것 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 풀고 있고, 그 과정에서 AI를 이렇게 활용해 성과를 높였다”가 훨씬 강력한 스토리가 된다. AI는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이고, 간판은 여전히 ‘이 회사가 풀고 있는 문제와, 그걸로 만들어 낼 숫자’여야 한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투자자들의 관심이 온통 AI로 쏠려 있는 지금, 비(非) AI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벤처투자 시장에서 소외되며 느낄 상실감이 매우 클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남들이 AI 스타트업이라는 이유로 수십~수백억의 투자를 유치하는 동안 자신은 VC 미팅을 잡기도 어려워지는 경험을 하면, “내가 틀린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사업의 본질이다. AI가 화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맞지만, 투자자들은 “AI냐, 아니냐”보다 “이 사업이 얼마나 단단하게 설계되어 있고, 앞으로 의미 있는 매출과 영업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를 훨씬 중요하게 본다. 굳이 본질과 맞지 않는 AI를 끼워 넣어 트렌드에 편승하려 애쓰는 것보다, 지금의 사업 본질을 얼마나 잘 설명하고 있는지, 그것을 숫자로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고 어떤 성과를 쌓아가고 있는지를 차분하게 설득하는 것이 투자 유치의 관건이다.

업의 본질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고, 기본기가 탄탄한 스타트업이 단지 AI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투자받지 못하는 일은 생각보다 드물다. 시장의 소음에 휘둘리기보다, 자신이 설계한 비즈니스의 구조와 실행력을 다시 점검해 보는 2026년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본질을 지키며 달려온 창업자분들께, 올해는 좋은 파트너와 기회를 만나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 유지윤 팀장은 현재 벤처투자회사(VC) 라이징에스벤처스에서 투자심사역으로 재직 중이다.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및 동 대학원 글로벌경영학 석사(MBA)를 마쳤다. LG상사(現 LX인터내셔널) 금융팀과 기획팀을 거쳐, 게임 개발 스타트업 플라이셔에서 사업팀장을 역임했다. 이후 벤처캐피탈리스트로 커리어를 전환, 현재 기술 기반 초기창업기업 전문 VC인 라이징에스벤처스에서 다수의 벤처투자조합을 운용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