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유연 근무제를 도입한 발빠른 기업부터 저녁 있는 삶이 얼마나 풍요로울지 꿈꾸게 만드는 서비스 업계들의 프로모션까지, 워라밸 기류는 심상치 않다. ‘과로 사회’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며 삶의 질을 말하는 이들의 바람이 더해졌기 때문. 실제 다양한 설문조사에서 대중은 일의 양보다 질이 높기를 바라고, 높은 연봉보다는 저녁 있는 삶을 꿈꾼다는 결과가 나왔다. 박봉에 저녁마저 없었던 이전의 현실을 넘어 워라밸 바람은 우리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 -편집자주
[뷰어스=문서영 기자]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아주 작은 시사 주간지였다. 그 곳은 금요일이 되면 밤샘 근무가 정해져 있었다. 꼬꼬마 시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 신입은 당차게 기사를 마감하고 편집본 확인까지 넘겼으니 집에 가겠다고 국장실을 찾아갔다. 그때 국장의 벙찐 표정이란. 떨떠름하게 “여자니까…”라며 들여보내줬는데 이후에도 나는 금요일 밤마다 대선배들을 사무실에 남겨두고 대중교통이 끊기기 전에 회사를 나섰다. 홍일점이었던 탓일까, 남자 선배들은 말은 못하면서도 눈초리는 정말 무서웠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자 회사가 방침을 바꿨다. 월요일 주간 회의를 없애고 금요일 회의로 바꾸고 주간 기사 마감 시한을 목요일로 앞당겼다. 목요일은 자율 야근, 금요일은 ‘칼퇴’. 간간이 금요일 저녁 식사 회식이 치러지며 회사 분위기는 고정 밤샘근무 때보다 돈독해졌다. 결혼한 선배들이 “집에 면이 선다”며 어깨를 툭툭 쳐주기도 했다.
실상 기자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일주일 내내 기사를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고 회사 역시 비용을 들여가며 야근을 시킬 이유가 없었던 것일 뿐이다. 하루 앞당겼을 뿐인데 모든 기자들이 금요일 저녁과 야근 후유증에 시달리던 토요일을 확보했다. 11년 전의 워라밸이었는지 모른다.
요즘의 한국도 달라지고 있다. 곳곳서 불필요한 야근을 없애고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자며 팔 벗고 나섰다. 이른바 워라밸 열풍이다. 일부 기업은 발빠르게 워라밸에 맞춘 각종 제도들을 도입했다.
(사진=이마트 제공)
■ 유통업계 선봉, 이런 변화
유통업계가 선봉에 서 있다. 롯데마트는 2016년부터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출근 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시차출근제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매주 수·금요일을 ‘가족 사랑의 날’로 정해 오후 6시30분 사무실을 강제 소등하던 것을 매일 강제 소등으로 확대 시행한다.
현대백화점그룹과 GS리테일은 ‘2시간 단위 휴가제’를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위메프도 마찬가지다. 2시간 단위로 쓸 수 있는 반차를 지난해 9월부터 도입했다. ‘반반차 휴가’를 통해 워킹맘 워킹대디의 편의를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또 위메프는 일과 가정의 양립이란 모토 아래 연간 180만원 상당 복지 포인트를 부여하고 있다.
LGU+는 새해부터 구성원 간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를 장려하기 위해 사내 상호 호칭을 ‘님’으로 통일한다.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통해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월ㆍ수ㆍ금 회식자리도 없앴다. 임직원들이 매주 월요일은 한 주의 업무를 효과적으로 계획하고, 수요일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고, 금요일은 주간의 피로를 풀 수 있도록 하고자 회식을 제한한 것이다. 퇴근시간 이후 야근을 제한하기 위한 ‘PC 오프제’를 도입했고, 사내 휘트니스 센터 종일 운영 등을 통해 직원들이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제대로 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최근 가장 이슈 몰이를 하고 있는 곳은 신세계. 신세계는 대기업 중 처음으로 올 1월부터 임금 삭감 없는 주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했다. 오후 5시가 되면 퇴근을 독려하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동시에 사무실의 개인 PC 모니터 한쪽에 ‘30분 이후 꺼집니다’라는 안내문과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일단 대기업과 유통에서 시작됐지만 워라밸에 발맞춘 기업 문화는 점차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도 지난해 12월 정부기관부터 ‘2주 여름휴가 분위기’를 만들어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장시간 근로에 익숙해진 관행을 깨뜨리고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사진=고용노동부 조사결과 갈무리)
■ 이미 달라졌던 대중의 인식
취업준비생들의 태도도 워라밸 열풍을 더욱 부추기는 모양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11월 전국 18∼34세 청년 1600명에게 ‘선호하는 청년 고용정책’을 물은 결과 청년들은 일자리를 늘리기보단 질을 높이는 정책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일자리의 질을 높여 달라는 답변이 57.3%(중복 응답), 일자리를 늘리거나(42.8%) 다양한 유형의 일자리를 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31.7%)는 답변이 뒤를 이었다.
특히 직장을 고를 때 회사의 인지도가 아닌 업무량과 ‘칼(정시)퇴근’을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 선택 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은 임금과 복지 수준(38.3%), 적성·전공·흥미와 맞는지(20.8%), 근로시간과 업무량이 지나치지 않은지(9.4%), 업무환경과 출퇴근시간이 적절한지(8.9%) 등 모두 워라밸의 범주 안에 속한다. 국내 청년층이 바라보는 ‘일자리의 질’이 워라밸과 직결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간의 한국 직장문화도 워라밸이 필요한 이유로 꼽힌다. 한국 직장인 근로시간은 세계에서도 악명 높은 축에 속한다. OECD에 따르면 2016년 기준 국내 1인당 연평균 근로시간은 2069시간에 달한다. OECD 국가 중 한국보다 더 많이 일하는 나라는 멕시코와 코스타리카 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바로 동생산성이다. 오래 일하는데 비해 정작 한국 근로자가 시간당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33.1달러로, OECD 평균(47.1달러)에도 한참 못미치는 꼴찌 수준이다. 생산성이 가장 높은 아일랜드(83.2달러)의 절반도 안 된다.
일은 가장 많이 하는데 결과치는 바닥인 셈이다. 결국 근로자와 기업 모두 손해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데 모두가 뜻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발맞춰 다양한 변화도 감지된다. 워라밸 바람은 ‘여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진=롯데백화점, 하비인더박스 홈페이지)
■ 저녁있는 삶, 시작해볼까요
평일 여가문화의 확산이 대표적이다. 신한트렌드연구소가 지난해 상반기 주요 대형 호텔의 평일 결제 건수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월요일(2016년 상반기 대비 23% 증가), 화요일(25%), 수요일(25%) 결제가 크게 늘었고 목요일과 금요일도 16%씩 늘었다. 영화관 결제도 월요일(7%)·화요일(18%)·수요일(33%)에 크게 증가했다. 연구소는 “호텔의 경우 호텔에 입점한 외식업체, 운동 시설 등 편의시설 중심으로 이용이 증가했다”며 “워라밸족이 늘어남에 따라 평일 여가 문화가 확산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백화점 문화센터 이용율도 급증했다. 지난해 롯데백화점은 문화센터 강좌를 수강한 20~30대 소비자의 수가 전년동기대비 150%가량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 봄 학기부터 퇴근시간인 오후 5시 이후에 진행하는 강좌 수를 30% 이상 늘릴 계획이다.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에선 2017년 가을학기 20대 수강생 비중이 15%를 기록해 전년동기(약 8%)의 두배 수준으로 증가했고, 현대백화점도 2017년 봄에서 가을학기까지 수강생 비중이 전년동기대비 20대는 4.3%포인트, 30대는 5.4%포인트 각각 늘었다.
가격 대비 심리적 안정과 만족감을 중시하는 가심비에 맞춰 다른 이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즐겁게 하는 목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늘었다. 여행업계에 따르면 최근 도심이나 근교의 호텔에서 주말이나 휴가를 즐기는 ‘스테이케이션’ 또는 ‘호캉스’가 늘었다.
취미를 찾아주겠다며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업체들도 각광받는다. ‘하비박스’ ‘하비인더박스’ ‘하비풀’ 등 업체들은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키트를 1~6개월 동안 정기적으로 배송해준다. 천연 가죽 필통 만들기, 네온사인 장식, 테라리움 등 공예부터 마술·드론·프라모델 등 오락형 패키지까지 테마가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