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대변하는 수식어 중 대표적인 말은 ‘열정’ ‘패기’와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요즘 청춘들은 열심히 사는 것보다 대충 살아야겠다고 입을 모은다. 다만 젊은 세대들이 말하는 ‘대충’은 회피의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또 다른 방향의 제시와 같다. 과연 청춘들이 놓인 현실, 그리고 이들이 택한 삶의 방식은 어떤 모습일까? ‘대충 살자’라는 말의 탄생 배경과 현재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사진=JTBC 화면 캡처)
[뷰어스=이소희 기자] “사람한테 사는 벌레 중 가장 해로운 게 뭔지 아세요? 바로 ‘대충’이에요”
그룹 동방신기 멤버 유노윤호는 JTBC 예능프로그램 ‘아는 형님’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매사에 성실하고 불타오르는 의욕을 지닌 유노윤호는 일명 ‘열정 만수르’로 불린다.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그의 열정에 대중은 “나는 유노윤호다”라는 ‘주문’을 만들어내기까지 이르렀다. 이 주문은 학교나 직장에서 지칠 때 혹은 게을러질 때 에너지 넘치는 유노윤호로 빙의하겠다는 의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못지않게 자주 쓰이는 말은 바로 “대충 살자. 나대신 유노윤호가 열심히 살아주니까”다. 사람들은 에너지 넘치는 유노윤호가 되겠다고 자신을 세뇌하면서도 ‘유노윤호가 남들보다 열정적인 태도로 살아가니 나 하나쯤은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런 속내는 대중이 유노윤호, 그리고 그와 반대로 시니컬하고 몸을 사리는 태도를 지닌 최강창민의 발언을 대할 때 태도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최강창민은 유노윤호가 예능프로그램 ‘한끼줍쇼’에서 “일을 시작했으면 마무리는 지어야지”라고 할 때 “끝장까지는 안 본다. 꼭 마무리를 지을 필요는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MBC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는 볼링을 치며 스트라이크를 외치는 유노윤호를 보면서 “내기나 경쟁 이런 것 안 한다. 그런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에 대중은 유노윤호를 웃음으로 대하던 것과 달리 격한 공감을 보인다.
이 같은 현상을 보면 “나는 유노윤호다”라는 말은 정말로 그처럼 열정을 다해 살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대비되는 자신을 바라보며 내뱉는 자조에 더 가까운 모양새다. “대충 살자”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일종의 해학인 셈이다. 이처럼 요즘 젊은 세대들은 소진해버린 열정에 불씨라도 붙이고자 고군분투하거나 혹은 내 열정을 차라리 다른 이에게 전가해버리며 힘든 현실을 웃음으로 채우고 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기를 바라는 사회(사진=JTBC '스카이캐슬' 화면 캡처)
■ "지금보다 어떻게 더 열심히 살아요?"
일각에서는 이런 ‘대충 살자’라는 가치관을 두고 ‘꿈이 없는 세대’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이 시대 청춘은 대충 살며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실제로는 “대충 살자”고 말하는 이들일수록 결코 대충 살고 있지 않다. 심지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당하면서도 그 사회에 길들여져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부족하다는 압박과 갈등을 느끼기도 한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7월 발표한 '2018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에 따르면 우리나라 임금근로자의 연간 근로시간은 2016년 기준 2052시간이다. OECD 가입국 중 멕시코(2348시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그로 인해 ‘번아웃 증후군’도 유행처럼 번졌다. 번아웃 증후군은 완벽한 성과를 내기 위해 혹은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순간 무기력한 상태가 지속되는 증상이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앱 블라인드가 한국 직장인 541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89.6%(4855명)가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직장인 112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역시 응답자의 49.7%가 ‘열정 감퇴’를 보였다. 과거에 비해 업무에 대한 열정이 떨어졌다고 여긴 것이다. 그 이유로는 ‘과도한 업무에 지쳐서’가 32.4%로 가장 많았다.
최근 신드롬을 이끈 JTBC 드라마 ‘스카이(SKY) 캐슬’에서 또한 이미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에도 더 치열한 열정을 바라는 상황에 처한 자식들이 등장한다. 극 중 차서준(김동희)과 차기준(조병규)는 지금보다 더 높은 성적을 바라는 아빠 차민혁(김병철)에게 지금도 충분한 수준이라고 호소한다. 강예서(김혜윤)는 한 문제도 틀려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를 완벽의 틀에 가둔다. 이런 장면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더 나아가 경쟁사회에 놓인 대중의 폭발적인 공감을 얻었다.
이렇게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은 잠시 쉬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부담에 시달리기도 한다. 최근 다니던 직장에서 퇴사 후 구직 중인 조모씨(27.여)는 “지금 일을 쉰 지 두 달 정도 됐다. 적성에 맞지 않아 직장을 나왔기 때문에 해방감을 느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또 다른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조씨는 “퇴사 후 일주일 정도는 괜찮았다. 그런데 점점 불안해졌다. 평소라면 당연하게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고 내 친구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 시간이 비어버리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도 더 커졌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적성에 맞는 곳을 두드려야 할지, 아니면 얼마 안 되는 경력이라도 살려 빨리 취업을 해야 할지 여전히 고민 중이다”라고 말했다.
(사진=픽사베이 제공)
■ 결국 좌절과 체념이 만들어낸 도피
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열정을 끊임없이 강요받는 젊은 세대이지만, 정작 그들이 놓인 환경에는 노력해도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는 점이다.
지난해 초 취업포털 사람인이 2030세대 성인남녀 118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자신을 무민세대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 이유로 “취업, 직장생활 등 치열한 삶에 지쳐서”(60.5%)라는 대답을 내놨다. 이런 무민세대가 등장한 원인으로는 57.4%의 비율이 “수저계급 등 개선 불가능한 사회구조”를 꼽았다.
이런 결과는 계층이동의 가능성이 없다는 좌절로 이어진다. 지난 9일 보건사회연구원의 ‘보건사회연구’ 최신호에 실린 ‘청년층의 주관적 계층의식과 계층이동 가능성 영향요인 변화 분석’에 따르면 2017년 30세 미만 청년 가운데 자신의 계층이동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본 청년은 38%에 그쳤다. 2013년(53%)에 비하면 현저히 감소한 수치다. 아울러 이들이 계층이동이 힘들다고 본 주요 원인은 ‘부모의 부(富)’, 즉 ‘돈’이었다. 이런 요소는 현실적으로 판도를 바꾸기 힘든 것들이다.
결국 젊은 세대들은 열심히 살라고 말하는 사회에 극도의 피로감을 느낀다. 또 열심히 해도 달라질 것 없는 사회에 깊은 상심과 무기력함을 겪는다. 실제로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12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뚜렷한 이유 없이 구직활동조차 나서지 않는 인구(비경제활동인구) 1673만여 명 중 ‘그냥 쉬었다’고 답한 인구는 202만여 명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200만 명을 넘은 수치다. 아울러 취업준비자가 전년대비 2만여 명 증가한 것에 비해 구직단념자(구직을 포기한 사람)는 그 두 배 남짓한 4만3000여 명이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차라리 그 열정을 포기하는 ‘체념’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충 살자’는 가치관이 만연하게 된 진짜 배경이다.
[대충 사는 사람들] ①‘무민세대’의 새로운 탄생, “대충 살자”는 새로운 마음
[대충 사는 사람들] ②“나는 유노윤호다” 주문 뒤 숨겨진 현실
[대충 사는 사람들] ③대충 살아도 괜찮나요? 허무주의 vs 재충전 사이에 놓인 ‘대충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