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영화 스틸 컷
카자흐스탄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한 ‘말도둑들. 시간의 길’은 한 가족의 비극을 관조적으로 지켜본다. 비극과 관조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들이 만나 새로운 감각들을 느끼게 한다.
‘말도둑들. 시간의 길’은 아내와 10살 남짓한 아들, 두 딸을 두고 말을 팔러 장터로 떠난 한 남자가 말도둑들에 의해 살해당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2015년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 상을 수상한 카자흐스탄의 예를란 누르무 함베르토 감독과 일본의 리사 타케바 감독이 공동 연출한 작품이다.
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으로 포문을 연 ‘말도둑들. 시간의 길’은 평화롭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초반을 지배한다. 아이는 말을 팔기 위해 장터로 떠나는 아버지와 무사 귀환을 함께 기도하고, 토마토를 따 돈을 버는 엄마를 돕기 위해 함께 길을 나선다. 아버지 역시 아이를 위한 아기 고양이를 챙기고, 말 가격을 흥정하며 일상을 영위한다.
모든 것이 순조롭던 순간, 아버지가 말도둑들에 의해 살해되면서 그들의 평화도 깨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분위기 전환의 순간마저 고요하게 포착해 오히려 낯선 감정을 준다.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결정적인 장면에서 카메라는 되려 한 발 물러나고, 그들의 비극을 관조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8년 전 갑자기 사라졌던 남자 카이랏이 등장해 미스터리함을 더하지만, 이조차도 담백하게 그려진다. 알고 봤더니 새 아빠였던 남자가 떠나고, 새로운 남자가 그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자극적인 설정도 자연의 순리를 따라가듯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특히 가족들의 이사를 돕기로 한 카이랏이 말무리를 몰고 초원 위를 달리는 모습에서는 그들이 처한 상황과 달리, 아름다움마저 느껴진다. 롱쇼트로 포착한 카자흐스탄의 넓은 평원이 와이드 스크린 위에 펼쳐질 때면 영화의 미학적인 완성도가 더욱 체감된다. 해가 지면 가족들과 야영으로 밤을 넘기고, 해가 뜨면 다시 달리는 과정까지 더해지면, 한 가족의 비극도 자연의 섭리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남편이 갑자기 죽고,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마저 견뎌야 하는 한 여성의 아픔을 묵묵한 얼굴로 그려낸 배우 사말 예슬리야모바를 비롯해, 알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정체성마저 모호한 카이랏 역의 모리야마 미라이의 담담한 얼굴이 영화의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세상을 보다가도, 아버지의 죽음 앞에 슬픔을 삼키며 성숙해진 아이를 그려낸 아역 배우도 탁월하다.
품은 이야기에 비해 지나치게 평화로운 영화의 분위기가 낯설 수 있다. 그러나 ‘말도둑들. 시간의 길’은 상업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으로 영화제의 포문을 신선하게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