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品位, Dignity)라는 단어는 자신의 가치를 존중하되, 타인에게도 존중받을 수 있도록 행동하는 태도와 수준을 뜻한다. 품위 있는 사람은 4가지 특징을 가진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일관성이다.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 잦은 사람이 존중받긴 어렵다. 두 번째는 타인에 대한 배려다. 무례한 언사로 남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 마주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세 번째, 감정이 절제된 논리적 표현이다. 충동적이고 흥분한 모습으로 상대를 비난하는 사람과는 대화 자체가 어렵다. 마지막은 정당하고 공정한 방식으로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세상은 협잡하다고 한다.

최근 우리는 이 4가지 품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세계 최강국 지도자를 목도하고 있다. 일관성은 오간데 없이 몇 시간 간격으로 관세를 부과했다 취소했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 무례한 언사로 면전에서 상대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기 일쑤고 흥분하지 않은 모습을 보기가 더 어렵다. 목적달성을 위해선 어떠한 협박이든 내놓을 수 있다는 식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해결하고 싶어하는 문제는 비교적 명확하다. 미국인들은 생산하는 것보다 너무 많이 소비한다. 그래서 막대한 무역적자를 내고 있고, 이를 메꾸기 위해 정부가 지속불가능한 부채 부담을 진다. 소비를 줄일 순 없으니(자국민에게 궁핍을 강제할 수는 없다) 관세로 수입을 차단하고 미국내 생산을 늘리려고 한다. 정부 지출을 줄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백을 대신해, 그동안 공짜로 미국으로부터 안보혜택을 제공받고 거대한 소비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던 주변국들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투자든 미국 제품을 더 사주든 선택을 하라고 압박한다.

한국은 미국의 안보와 시장 제공 덕분에 고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대표적인 국가다. 그런 나라 국민으로서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가 안타깝고 두렵다. 하지만, 미국인의 시각으로만 보면 저런 문제의식은 합리적일 수 있다. 누가봐도 미국의 정부부채 규모는 지속불가능하고 미국 소비자들이 언제까지 저렇게 많은 물건을 사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힘든 일이 되겠지만 우리도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합리적이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라도, 그 실행에 어떠한 품위도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여러 주변국들을 동시에 겁박하고, 국권을 포기하라는 등의 폭언을 일삼고, 근거없는 허위사실을 열거하며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다. 이 같은 불필요한 행동이 세계를 위태롭게 하고, 시장의 불확실성을 높이고, 막대한 비용을 만들어낸다. 트럼프는 오래전 자신의 저서 “협상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에서 “큰 목표를 세우고 강하게 밀어붙여야 하며”, “위협과 허세를 전략적으로 사용하고”, “상대를 불안하게 만들어 페이스를 장악해야 한다.”라고 했다. 정말이지 본인 말 그대로를 실천하고 있는데 문득 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제임스 딘은 헐리웃을 상징하는 이름 중 하나다. 제임스 딘이 유명해진 것은 지금로부터 70년전 1955년에 나온 ’이유없는 반항’이라는 영화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10대 청소년으로 나오는 제임스 딘은 전학을 갔다가 텃세에 직면한다. 제임스 딘을 고깝게 여긴 학교 짱은 내기를 제안한다. 깊은 낭떠러지를 향해 둘이 동시에 전속력으로 차를 몰다가 먼저 서거나 뛰어내리는 사람이 지는 간단한 룰이다. 우리가 흔히 ’치킨게임’이라고 부르는 담력싸움. 영화에서 차는 절벽으로 내달리고, 주인공 제임스 딘은 먼저 뛰어내린다. 싸움을 걸어온 학교 짱도 사실 뛰어내릴 생각이었는데, 발이 차안에서 걸려버리고 말았다. 그는 차와 함께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한다.

치킨게임은 가장 질낮은 협상 전략이다. 사실 치킨게임에 뛰어든 이들 모두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길 수만 있다면 죽음도 감수하겠다는 미치광이를 자처한다. 허위와 겁박으로 상대방을 사지로 내몰고 원칙이나 존중 따위는 없다. 그저 니가 겁쟁이임을 인정하고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윽박지르기 뿐이다. 지금 전세계는 영화속 10대 반항아들이나 하는 치킨게임의 한복판에 있다. 차를 몰고 달리는데 낭떠러지가 코 앞이다. 이대로 보름이 지나면 캐나다, 멕시코의 모든 수입에 25% 관세가 부과될 것이고, 유럽 와인에는 200%의 관세가 붙는다. 눈치보며 떨고 있는 한국, 일본 같은 국가들에도 곧 초인종이 울릴 것이다.

치킨게임의 본질은 아무도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담력 싸움일 뿐이다. 서로 기세등등하기에 빠르게 차를 멈춰 세우진 않을 것이다. 다만 발목이 차 안에 걸리지 않는 이상 결국 마지막 순간엔 차에서 뛰어내릴 것이다. 과정은 험난하겠으나, 전면적 고율 관세부과보다는 어느 정도 수준에서의 협상이 이뤄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협상이 이뤄질지라도 상처는 남을 것이다. 담력을 자랑하느라 끝까지 차를 몰았기 때문에 뛰어내렸어도 차는 절벽 밑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 관세와 리쇼어링으로 재정적자를 일부 줄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관세를 부과한 품목의 가격상승, 이로 인한 관세부과 대상이 아닌 다른 품목에 대한 실질 소비 감소, 생산성 저하로 인한 타격은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시도가 장기적으로 미국이 처한 위기 - 과도한 연방정부 부채와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치유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이 무역전쟁이 단기적으로 '미국 예외주의(Exceptionalism)'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은 비교적 확실하다. 지난 5년간 미국만 성장하고, 미국 자본시장으로 모든 자금이 빨려 들어가는 미국 예외주의는 방대한 재정지출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제 미국은 타국을 겁박하며, 국내에선 정부효율화를 명목으로 재정지출을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반면, 미국으로부터 협박받는 국가들은, 미국향 수출을 대체할 역내 소비를 자극하고 자국의 안보 역량을 높이기 위해 앞다투어 재정지출을 늘리고 있다. 단기적으로 미국을 제외한 유럽, 중국 등 타 지역(Rest of World)의 경제성장률은 이 무역 전쟁으로 인한 재정 확장으로 인해 오히려 높아질 것이다.

세계는 지난 200년간 '비교우위'의 개념에 기반한 글로벌 무역확대가 인류의 후생을 극적으로 증가시킨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간 쌓인 각자의 모순으로 200년간 증명된 체제를 스스로 절단내려 한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이 먼저 피해를 보고, 타국의 경기는 오히려 자극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겠지만, 장기적으로 교역감소는 모든 나라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고 세계 전반의 생산성 개선을 둔화시킬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배적 권력과 체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국가간 그리고 집단간 갈등은 무한히 심화될 것이다.

솔직히 터놓고 다같이 협력적으로 대안을 모색하는, 상호이익을 도모하는 원칙 기반의 품위있는 협상법도 있는데, 미국은 그렇지 않은 길을 택했다. 미국의 선택이지만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다. 한국의 정치와 언론, 그리고 사회 분위기도 이미 품위를 잃은지 오래지 않은가. 편을 나누고 상대방을 멸절시켜야 할 존재로 여기고 무한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방식이 한국에서도, 그리고 전세계 도처에서도 이미 일반적이 됐다. 호모 사피엔스가 경쟁관계에 있었던 다른 인류 아종보다 우수했던 것은 상징적인 언어 커뮤니케이션으로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것이다. 그 사회적 협력의 정점이 현대 문명인데, 왜 인류는 분절과 고립, 그리고 과격한 적대를 그토록 원하는지 모르겠다.

앞으로의 투자는, 과거보다 한결 힘들어질 것 같다. 적대와 확산 속에 기회는 줄어들 것이고, 변동성과 위험은 커질 것이다. 투자만 하면 오르던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재검토도 필요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과잉 유동성 시대 15년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보다는 투자에 몰입했고, 그러면서 투자에 중독됐다. 지금의 급격한 변화가 지난 15년과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만들게 될 것인데, 그간의 몰입과 중독에 익숙한 우리가 그런 적응을 빨리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강대권 대표는 현재 라이프자산운용을 이끌고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산업경제학 전공)를 마쳤고, 서울대 가치투자 동아리 '스믹(SMIC)' 출신으로도 유명하다. 가치투자 2세대 스타 펀드매니저인 강 대표는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을 거쳐 유경PSG자산운용에서 최고투자책임자(CIO)를 역임했다. 당시 국내 운용사 최연소 CIO다. 지난 2016년, 2020년 국내 주식형 운용사 수익률 1위를 기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