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류의 역사에는 세계화의 물결이 일었다 사그라드는 주기가 반복돼 왔다. 세계화의 팽창 국면에는 보통 하나의 강력한 패권국이 등장해 넓은 지역을 단일 질서로 재편한다. 로마, 몽골, 대영제국, 미국 등 역사적 헤게모니 국가들이 그런 역할을 했다. 이들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제도와 화폐, 교통망을 표준화함으로써 광범위한 통합을 이뤄냈다. 하지만 통합이 오래 지속되면 필연적으로 내부 균열이 생겨난다. 그로 인해 글로벌 질서는 다시 분열과 쇠퇴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팽창기 : 단일 패권 아래 '통합과 교류'

로마는 지중해를 통합하고 장거리 무역을 활성화했다. 동양의 비단과 보석이 들어오고, 로마의 유리와 직물이 인도와 중국까지 수출되는 등 동서 교역이 번성했다. 몽골 제국 치하에선 역사상 처음으로 동양과 서양이 하나의 패권 아래 놓이며 실크로드 교역로가 완전 개방됐다. "금덩이를 이고 가는 처녀도 몽골 영토를 무사히 횡단할 수 있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여행과 상업의 안전이 보장됐다. 페스트 같은 질병까지 동서양을 관통해 퍼진 것은 몽골 시대 세계화가 어느 정도까지 나아갔는지를 보여준다.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군림하며 전 세계를 잇는 해양 교역망을 구축했다. 영국 파운드화는 기축통화로 기능했고, 강력한 해군력이 해상 무역의 안전망이 됐다. 특히 벨에포크 시대라고 불리는 19세기말~20세기 초에는 국제무역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산업화가 가속화됐다. 전신과 증기선으로 정보와 상품이 지구촌을 빠르게 순환하면서, 식민지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자본과 재화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퇴조기 : 양극화와 불만의 누적

세계화의 밝은 면 뒤에는 항상 그늘과 긴장이 존재했다. 레이 달리오는 거대 제국들의 흥망사를 연구하며, 과도한 부채 누적, 내부의 정치적 양극화, 그리고 외부 강대국과의 경쟁 격화가 한데 어우러질 때 사회 붕괴가 촉발된다고 지적한다.

로마 제국은 전성기 이후 식민지로부터 조세와 노예에 의존한 경제구조가 사회적 불평등을 키웠고, 군대와 관료제를 유지하느라 재정이 고갈됐다. 영국은 19세기 말까지 패권을 유지했지만, 식민지 유지를 위한 막대한 재정 부담에 시달렸다. 또한 신흥 도전 세력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앞서 언급한 독일과 미국처럼, 혹은 로마 시기의 고트족이나 몽골 시기의 반란처럼, 주변부의 도전자들은 기존 질서의 약점을 파고들어 패권에 도전한다.

이런 도전이 붕괴로 연결되는 결정적으로 계기는 양극화다. 세계화 팽창기 동안 혜택을 본 계층과 지역은 계속 번영하지만, 그렇지 못한 계층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빈부 격차와 지역 격차가 크게 벌어진 사회는 결국 정치적 극단주의나 내부 투쟁으로 혼란에 빠지기 쉽다.

통합됐던 질서가 붕괴하고 분열과 혼돈의 시기가 찾아오면 인류는 저성장과 침체의 기나긴 터널을 지나야 했다. 로마 제국 몰락 이후 찾아온 중세 암흑시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몽골 제국 붕괴 후 실크로드의 안전이 무너지고 교역이 급감했다.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자유무역 시대가 종언을 고하자, 이어 등장한 것은 각국의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이다. 특히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는 세계 교역량이 폭락하고 각국이 관세 장벽을 치며 국제 공조가 실종됐다.

우리 시대의 세계화

40년 가까이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팽창하는 시기를 우리는 살아왔다. 하지만 확고해 보이던 미국 패권을 최근 미국 스스로 무너뜨리는 조짐이 나타난다. 이는 앞서 살핀 역사적 주기의 현대판이라 할 만하다.

베를린 장벽 붕괴이후 1990년대의 호황은 마치 벨에포크 시대와도 같다. 20세기 제국주의 열강간의 누적된 긴장은 1914년 사라예보 사태로 터졌는데, 2001년에는 9.11테러가 있었다. 1929년 대공황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궤를 같이 하고 각각의 사건 직후 펼쳐진 뉴딜정책과 무제한 양적완화도 서로 닮아 있다. 1937년 루즈벨트는 재정지출을 삭감하며 다시 불황을 불러오고 이것이 2차대전의 단초가 되는데 현대에는 팬데믹 대응 등으로 재정지출을 늘린 미국이 국가부채 부담이 2차대전 이후 최고 수준에 달하자 트럼프로 정권이 교체돼 무역전쟁이 시작되고 말았다.

외부 도전자의 부상 역시 두드러진다. 중국은 더 이상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순응하는 주변부가 아닌, 독자적 규범과 영향권을 추구하는 강대국으로 변모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비서구권의 동등한 경쟁자를 마주한 셈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90년대 초반 '역사의 종말'에서 미국식 자유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외쳤다. 하지만, 이제 국제체제는 다시 20세기 초 열강 경쟁기에 가까운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우리가 지난 30년간 경험해왔던 세계화는 끝났다”고 단언한다.

분열의 대가 : 생산성 둔화와 투자환경의 변화

과거 전환기에는 늘 대규모 전쟁이 뒤따랐다. 오늘날의 미·중 경쟁은 군사적 충돌이 아닌 기술·경제·자본의 전면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총성 없는 패권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구조적 변화는 투자자들에게도 늘 새로운 도전을 던져준다. 세계화 시대에는 글로벌 분업 덕분에 기업 이윤과 생산성이 높아진다. 이에 힘입어 자산가격과 투자수익률도 우상향하는 구조적 추세가 있었다. 하지만 탈세계화 시대에는 전체 파이가 빠르게 커지기 어렵다. 각종 불확실성 비용이 늘어나 기업들의 이익률이 낮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인플레이션 압력도 높아져 자본비용 상승과 자산가치 할인 요인이 돼 투자환경을 한층 까다롭게 만든다. 세계화의 배당금으로 누려왔던 높은 성장과 풍부한 유동성의 시대가 저물고, 분열의 비용을 고려해야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투자 전략 측면에서 이는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지난 세계화 시대에는 특정 지역에서 성공한 혁신이 세계로 확산되면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했다. 이는 성장기업에 장기투자하는 것이 좋은 투자라는 논리로 이어졌다. 앞으로의 혁신은 지역별로 구분돼 전체 성장에 제한을 받는다. 게다가 높아진 불확실성과 물가압력은 미래 가치에 대한 할인율을 크게 높인다. 과거처럼 글로벌 시장의 상승 추세에 편승하는 투자만으로는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다. 성장기업에 장기투자하면 된다는 논리도 더이상 신뢰하기 어렵다. 낮아진 성장률과 수익률을 전제로 보다 신중한 장기 전략이 필요해지는 이유다.

특히 포트폴리오의 글로벌 분산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세계화 시대에는 전세계 자산이 어느 정도 동조화됐고 이것은 성과가 좋은 특정 자산(예를 들면 미국주식)으로의 집중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탈세계화 시대에는 블록 간 경제 충격이 서로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역사는 세계화의 팽창과 퇴조라는 거대한 물결이 인류의 경제 지형을 바꾸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운 나쁘게도 지금 우리는 팽창의 말미, 퇴조의 시작이 겹쳐지는 전환기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듯하다. 하지만 어떻게든 길을 찾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변화는 다수를 괴롭게 하지만 누군가에겐 또 기회가 된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음모를 꾸미는 인물은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혼돈(Chaos)은 구덩이가 아니라 사다리다. 오직 사다리만이 진짜다. 오르는 것이 전부다."


강대권 대표는 현재 라이프자산운용을 이끌고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산업경제학 전공)를 마쳤고, 서울대 가치투자 동아리 '스믹(SMIC)' 출신으로도 유명하다. 가치투자 2세대 스타 펀드매니저인 강 대표는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을 거쳐 유경PSG자산운용에서 최고투자책임자(CIO)를 역임했다. 당시 국내 운용사 최연소 CIO다. 지난 2016년, 2020년 국내 주식형 운용사 수익률 1위를 기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