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 '승부'를 봤다. 단순히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 때문은 아니다. 그 안에서 필자는 한 세대가 물러나고, 또 다른 세대가 올라오는 순간을 봤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첫 공식 대국. 이는 단순한 한 판 바둑이 아니다. 시대가 바뀌는 소리, 세상의 질서가 교체되는 울림이다.
젊은 시절, 텔레비전에서 보던 조훈현은 그야말로 국민 영웅이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 강자. 그런데 그가 제자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는 모습을 보니 묘한 감정이 일었다. 강물이 바위를 천천히 깎아내 결국 새 물길을 내듯, 세상은 그렇게 바뀌는 것이었다. 우리는 종종 그것을 보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할 뿐이다.
오늘날의 바둑은 이미 또 다른 물길을 내고 있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사범에게 배우고 기보를 외운다'는 전통을 무너뜨렸다. 세계 최정상 기사 신진서는 AI의 계산을 바탕으로 전혀 다른 기풍을 만들어냈고, 그 기풍이 다시 한국 바둑을 세계 정상에 올려놨다. 금기라 불리던 수가 어느 날 갑자기 ‘최선의 수’가 되어 버렸다. 오랜 상식은 무너졌다. 바둑이 전해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변화 앞에 머뭇거리는 순간, 생존 가능성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풍경은 경제에서도 똑같이 펼쳐진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다. 화장품 업계의 신흥 강자 에이피알이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의 시가총액을 추월했다. 전통 강자들이 굳건히 지켜온 자리를, SNS와 데이터 마케팅이라는 신무기를 장착한 후발 주자가 흔들어버린 것. 난 이 소식을 접하고, 바둑판 위에서 금기를 깨는 한 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자동차 산업의 사례는 더 극적이다. 전통의 거인들이 내연기관에 머무는 사이, 테슬라는 전기차와 소프트웨어라는 전혀 다른 게임의 법칙을 꺼내들었다. 이제 시장은 테슬라가 만든 규칙 위에서 돌아간다. 한때 절대 강자들의 자리는 무너졌고, 변화에 가장 과감했던 자가 중심에 섰다.
돌이켜 보면, 이런 이야기는 생물학의 원리를 되풀이할 뿐이다. 환경이 달라지면 생명은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변하거나, 아니면 사라지거나. 진화는 선택지가 아니라 생존이다. 내 삶을 돌아봐도 비슷한 순간이 많았다. 익숙한 길에 머물고 싶은 마음은 늘 크지만, 새로운 길을 향해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예상치 못한 기회가 열렸다. 변화는 늘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 속에 길이 있었다.
오늘날 세계 무역 질서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유럽의 공급망 재편, 신흥국의 부상은 모두 새로운 경제 지도를 그린다. 국가 간 역학 관계의 변화는 곧 기업 환경의 변화로 이어진다. 보호무역주의, 기술 패권 경쟁, 탄소 규제 같은 새로운 규칙들은 기업들에게 단순한 ‘리스크’가 아니라 생존을 가르는 분기점이 됐다. 세계 무대가 바둑판이라면, 지금은 기존 포석이 무너지고 전혀 다른 국면이 열리는 순간이다.
이때 기업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단순하다. 빠른 변화를 더 빠르게 읽고, 그에 맞춰 과감하게 적응하는 것이다. 자원을 분산하기보다 핵심 역량에 집중하고, 불확실성을 감수하더라도 용기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시장과 고객은 주저하는 자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위기 속에서도 과감히 나아간 기업만이 새로운 질서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변화의 시대에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는 뭘까.
무엇보다 학습 속도를 높여야 한다. 새로운 기술과 흐름을 기민하게 받아들이는 ‘러닝 머신’이 되어야 한다. 실험해 보고, 빠르게 실패도 해보고, 다시 일어서는 용기도 필요하다. “원래 그렇게 해왔다”는 말이 가장 위험하다. 속도의 경제를 설계해, 고객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읽고 즉각 대응하는 능력도 필수다.
영화 '승부', 신진서의 '바둑', 에이피알의 '도전', 테슬라의 '혁명'. 모두 같은 진리를 말해준다. 세상은 끝없이 변한다. 변화를 수용한 자만이 그 끝에서 살아남는다. 진화하지 못하면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것은 자연의 원리이자 사회의 법칙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내려진 냉혹한 명령이다.
■ 김종선 대표는 경영학박사로, 현재 기업 경영 자문 및 밸류업 관련 전문컨설팅회사 '제이드케이파트너스'를 운영 중이다. 지난 30여년간 코스닥협회 등에서 상장회사관련 제도개선 및 상장회사 지원 업무를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초기기업부터 상장회사까지 성장 과정 전반에 관한 전문적 자문을 활발히 수행한다. 아울러 벤처 및 상장회사 관련 제도개선에도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등 기업 애로사항 해소를 위한 부분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