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한빛 PD가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노동 실태를 고발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지 2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드라마 스태프들은 관행이라는 이름하에 정당한 임금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잠잘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폭력적인’ 노동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다. 드라마 제작 현장에 여전히 만연한 병폐와 건강한 드라마 산업구조를 만들기 위한 변화의 움직임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사진='수퍼내추럴', '워킹데드', '왕좌의 게임', '고담'/각각 AXN, 폭스채널, 스크린, 올레tv 제공)
[뷰어스=노윤정 기자] 배우 김윤진은 SBS 주말드라마 ‘미스 마, 복수의 여신’ 기자간담회에서 19년 만에 국내 드라마로 복귀한 소감을 이야기하던 중 “하루에 20신을 찍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말 '대한민국 파이팅'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김윤진은 줄곧 영화와 미국 드라마에 출연해왔던 터.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김윤진이 한 말은 웃으며 한 이야기였음에도 어쩐지 씁쓸하게 들렸다. 국내 드라마 촬영장의 악명 높은 노동 강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대체 미국 드라마는 어떤 환경에서 만들어지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사진=Pixabay)
■ 드라마 스태프 권리, 노조·계약서가 보호한다
미국 드라마 제작 현장이라고 해서 노동 강도가 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스태프들의 적정 휴게 시간 보장, 노동자로서 스태프의 기본적 권리 보호라는 면에서 국내 실정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일단 미국 드라마 산업은 규모가 큰 만큼 노동조합(노조)도 발달해있다. 스태프들의 권리도 강력한 노조에 의해 제대로 보호받고 있다. 때문에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스태프들의 권리를 명시적으로 적어둔 계약서도 아주 중요하게 여겨진다.
‘미드와 한드, 무엇이 다른가’의 저자 유건식씨 역시 미국과 한국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로 바로 이 계약서 문제를 꼽았다. “미국의 드라마 제작은 모든 것이 계약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유건식씨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 드라마의 경우 작가 계약, 감독 계약, 배우 계약 등 필요한 각각의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예 제작이 진행되지 않는다. 프로듀서가 드라마 기획안을 만들고 나면 작가와 감독, 주연배우 계약을 가장 먼저 진행한다. 이때 제작사나 프로듀서는 작가노조, 감독노조, 연기자노조 등과 조합의 기준을 따르겠다는 계약(시그너토리, Signatory)을 해야 한다. 계약서의 조항들이 노조의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응답자 291명 중 26.8%(서던포스트 조사)가 최근 촬영한 드라마에서 구두계약만으로 일했다고 답한 한국 스태프들의 실상과 견주어 체계적이고 확실하게 스태프의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 또한 스태프들에게 해당 직무의 전문가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해주고 있다.
이와 관련, 미국에서 드라마 어시스턴트 에디터로 근무 중인 문성환씨는 “모든 스태프들이 각각의 노동조합에 속해 있고 이 노조의 연합체가 스튜디오와 정기적으로 일종의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한다.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작품은 크게 노조에 속한 스태프·배우가 참여하는 유니온 쇼(Union show)와 노조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작하는 논-유니온 쇼(Non-Union show)로 구분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드나 극장에서 보는 큰 영화들은 대부분 유니온 쇼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 유니온 쇼에 속하는 작품을 만들 때 바로 저 표준근로계약서가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이 표준근로계약서는 드라마 제작 스태프들의 과노동을 규제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단서가 된다. 철저하게 계약서에 따라 근무하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노동 스케줄을 강요받지 않는다. 미국 드라마 제작 스태프은 보통 일일 12시간, 주당 60시간을 근무한다. 12시간 근무 제도가 정착돼 있어 스태프들은 물론 배우들도 그 이상 현장에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리고 하루 일이 끝나고 다음 날 다시 근무를 시작할 때까지 8시간의 휴식 시간을 보장받는다.
(사진='그레이 아나토미', '크리미널 마인드', '오펀 블랙'/각각 ABC, CBS, AXN 제공)
■ 미드 퀄리티의 비결? 편집 기간만 일주일 이상
주 1회 편성, 파일럿 시스템, 시즌제가 정착돼 있다는 점도 국내 드라마 제작 환경과 다른 점으로 꼽을 수 있다. 일단 주 1회 편성이니 한 주에 방송되는 분량이 적다. 또한 시즌제 드라마가 대다수라 한 시즌을 끝낸 이후 휴식기를 가지며 다음 시즌 분량을 찍기 시작한다. 이렇게 일정 분량의 촬영분을 확보해둔 상태에서 방송에 들어가기 때문에 사전제작이 아니더라도 제작 일정이 상대적으로 여유롭다. 문성환씨 역시 한국과 미국의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일정 운영에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며 “(편집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에서는 회당 편집이 주어지는 시간이 그리 길지 못하고 심지어는 방송 당일에 마지막 촬영분이 도착하는 경우도 있다. 그에 반해 미국에서는 회당 편집에 짧게는 1주일에서 길게는 4주가량이 주어진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시간적 여유가 있다 보니 프리프로덕션(사전준비작업), 포스트프로덕션(후반작업) 기간도 충분히 보장된다. 국내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는 연출자가 편집까지 거의 책임지고 있다. 안 그래도 늘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에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려니 방송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에 쫓겨 편집을 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와 달리 미국은 7~8일가량 촬영을 진행한 후 편집자가 3일간 1차 편집을 하고 이후 감독이 4일간 2차 편집한다. 이후 프로듀서가 다시 5일간 편집할 수 있다. 프로듀서 컷이 완성되면 스튜디오(국내 제작사에 해당)에서 2일, 네트워크(국내 방송국에 해당당)에서 4일간 편집할 수 있는 기간이 각각 보장된다. 이렇게 포스트프로덕션 기간이 길게 주어지니 스태프들은 시간에 쫓겨 촬영하거나 편집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후반 작업에 공을 많이 들이는 만큼 자연히 작품의 질 역시 높아진다.
시청자들은 드라마가 흡인력 있는 전개와 완성도 높은 연출을 보일 때 종종 ‘미드 같다’는 평을 하곤 한다. 그만큼 미국 드라마는 특히 연출 면에서 한 편 한 편 영화 못지않은 퀄리티를 자랑한다. 여기에는 제작 스태프들이 제 기량을 다 펼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노동 환경이 큰 몫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양질의 작품이 계속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는 이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촬영 및 편집 시간이 충분해야 한다. 갈수록 한국 드라마의 퀄리티가 높아지고 한류 열풍을 이끌고 있지만 스태프들의 극한 노동력을 짜내는 현재의 제작 환경이 유지된다면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김두영 지부장은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를 이야기하던 중 “일부 직무에는 신규 인력이 공급되지 않고 있다. 젊은이들이 지원을 안 하는 거다. 노동 환경 자체가 굉장히 병들어 있다는 뜻이다”고 말하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신규 인력이 공급되지 않는 산업은 점점 세가 기울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드라마 산업의 선진국인 미국의 제작 시스템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문성환씨의 경우 주 2회 편성 문제를 지적하며 “드라마 제작 환경을 개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편성을 주 1회로 바꾸고 방송사가 제작비를 늘리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제작비가 충분하다면 스케줄을 좀 더 합리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생방 촬영’도 개선될 수 있을지 않을까 한다”고 설명했다.
만약 당장의 구조적 변화가 어렵다면 회당 편성 시간을 줄이고 개정된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것부터 시작해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것도 국내 드라마 산업을 병들게 하는 폐단을 없애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