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 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사진=연합뉴스)
“삼성전자 주가가 올라서 수익률이 높아지면 지점 담당 직원들이 고객한테 연락을 하거든요. 그런데 연락받은 사람들이 ‘그건 내 주식 아니니까 건드리지 말라’ 그래요. 삼성그룹 계열사 임원들 계좌마다 하나같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비서실에서 ‘누구 계좌에 있는 것 얼마 팔아서 현금으로 인출해오라’는 연락이 오더라고요. 차명계좌였건 거죠.”
삼성그룹이 국제증권을 인수한 것은 1992년. 당시 글로벌 투자 자금을 국내로 끌어들여 자본시장을 성장시키는 것은 국내 경제의 주요 화두 중 하나였다. 이때 이건희 전 회장은 시장에서 거론되는 다양한 증권사 매물들을 직접 검토하고 확인한 끝에 국제증권를 인수키로 결정한다.
삼성증권에 대한 이 전 회장의 관심은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제증권 인수 이후 사재를 출연해 1% 지분을 매입하며 20년 가깝게 주요 주주로 올라 있었던 그는 틈틈이 삼성증권의 경영 전략과 방향을 점검했다. 삼성전자 자금팀장, 삼성생명 전략기획실장 등 요직을 맡기면서 곁에 두었던 황영기 전 사장을 비롯해 경제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를 투입하고 배치했던 것만 봐도 이 전 회장의 지원사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오너의 애정을 거름 삼아 빠르게 기반을 잡으며 삼성증권은 또 하나의 ‘삼성 브랜드’ 파워를 입증한다. 세상은 증권업에 대한 이 전 회장의 애정에 주목하며 삼성이 만들어낼 자본시장에서의 성장력에 대해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이 삼성증권을 애정하고 자주 찾은 것은 비단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지난 2018년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의원실이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이 전 회장이 금융실명제의 실명의무를 위반한 불법 차명계좌가 1229개에 달했다. 이 중 1133개가 증권 계좌인데 삼성증권에 개설된 계좌가 무려 918개(81%)를 차지했다. 이 전 회장이 처음 삼성증권에 차명계좌를 개설한 것은 1993년. 그리고 2004년 한해에만 141개의 차명계좌를 개설하는 등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수백개의 차명계좌를 만들었다. 특히 금융실명제 시행 이후에도 이 전 회장은 삼성증권을 지근거리에 두고 사실상 사금고처럼 이용했던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다.
“당시에 이 전 회장은 부친인 이병철 선대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차명계좌의 대부분이 금융실명제 도입 이후에 만들어졌으니까요. 돈의 용도를 명확히 추적할 수는 없지만 차명재산과 각종 비자금 등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죠.”
■ 상속 '마지막 퍼즐' 위한 손발 역할
삼성그룹이 계열사로서 삼성증권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에 삼성그룹 안팎의 다수 관계자들은 ‘손과 발’이 돼 주는 조직이라고 전해왔다. 그룹의 컨트롤 타워였던 미래전략실 등 싱크탱크에서 큰 그림을 그려내면 이것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핵심축 중 하나가 증권이라는 얘기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15년 자본시장을 뒤흔들었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건이다. 당시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병상에 누워 있는 상황에서 빠르고 효율적인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확보가 필요했다. 제일모직 지분(23.2%)만 보유하고 있던 이 부회장으로선 대규모 자금 투입이 필요한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지분 인수보다는 삼성물산 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훨씬 간단한 카드였다.
“사실 이재용(회장)이 날로 먹는 거였죠. 자기 주머니에 30원 넣어두고 100원짜리 회사를 10원에 먹은 겁니다. 세금한푼 안내고 상속 마무리짓겠다는 건데 국민이익, 사회정서와는 상당히 괴리가 있는 합병이었습니다.”
엘리엇은 실제 합병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며 반대를 외쳤다. 그간 국내 시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왔던 삼성으로서도 한달 이상 이어진 엘리엇과의 사투에는 상당한 노력을 들여야 했다.
“이재용 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에 최대 핵심작업이었기 때문에 자본시장 전반에 대한 실질적 손발 역할은 삼성증권이 맡았습니다. 어떤 회사 주주에게 가서 승인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료들도 증권에서 일일이 만들었습니다. 합병 시 장점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고 읍소해야 한다는 등 일종의 가이드라인 말입니다.”
당시 삼성증권 수장이던 윤용암 사장은 대외적으로도 “증권가에서는 합병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등 여론몰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실제 합병 당사자인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CEO들이 말을 아끼거나 사안에 대해 극도로 조심하던 스탠스와는 확연히 달랐다.
“자본시장에서 이뤄지는 지배구조 개편안이니 삼성증권이 주도적으로 판을 깔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어요. 그룹 자체 작업이기도 했지만 당시 윤 사장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내부 임원들도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는 데 혈안이었습니다.”
증권의 도움을 받은 그룹도 직접 움직였다. 당시 타 증권사에서 WM 임원이던 한 관계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어느 날 삼성전자 IR 담당 임원이 찾아왔어요. 저한테 서류를 내미는데 보니까 저희 증권사에 삼성물산 주식을 3000주 이상 보유하고 있는 주주명단이더라고요. 어디서 확보한 자료인지는 모르겠지만 삼성물산 합병안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하면서 고객들한테 찬성표를 받도록 움직여달라는 부탁이었어요. 삼성과 관계도 있고 하니 지점에 전달해 받아줬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주주총회에서 특별 결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는 필요했던 찬성표는 참석 의결권의 3분의 2인 66.67%. 결국 삼성은 막판 여론 뒤집기를 통해 69.53%로 가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재용 당시 부회장은 이 회사의 최대주주로, 삼성그룹의 실질적 경영권을 확보하면서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분수령을 넘는다.
■ 1등이 될 수 없는 삼성증권의 활용가치
그렇다면 그룹 내에서 ‘행동대장’ 삼성증권의 존재감은 어느 정도일까.
삼성물산 합병의 고비를 넘긴지 4개월 만인 2015년 11월. 이재용 회장은 삼성증권을 첫 방문한다. 당시 부친의 공백으로 삼성전자와 금융부문에 대한 경영을 맡고 있던 이 회장은 금융 계열 4개사를 찾아 업무보고를 받는다. 업무보고에 대한 판단 기준은 글로벌화 가능성 여부, 그리고 혁신성장성 두가지였다.
‘본좌’ 삼성생명, 그리고 당시 ‘다이렉트 서비스’를 통해 성장세가 뚜렷했던 삼성화재는 무난히 합격점을 받았다. 뒤이어 금융계열사로서 존재감은 미미했지만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에서 80%에 육박하는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던 삼성자산운용도 이 회장을 흡족케 했다. 남은 건 삼성증권. 글로벌 진출의 비전을 제시하기에는 2009년 홍콩법인을 통해 이미 쓴맛을 본 상태였고 증권업에서 혁신적 사업 구상을 내놓기에는 삼성의 색깔과는 결이 맞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즈음 증권가에서는 삼성증권 매각설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 미래에셋증권이 대우증권 인수를 통해 시장의 판을 크게 흔들었던 시기였던 만큼 삼성이 신한금융, 한화그룹 등과 교감이 있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
10년, 20년 비전을 그려놓고 짜여진 각본처럼 전진하던 삼성그룹의 시계추가 세상과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즈음부터다. 국정 농단 사건에 연루된 이재용 회장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등 사법리스크에 시달리는 동안 주인 없는 삼성의 시간은 유례없이 더디게 흘렀다.
오너의 공백기 삼성증권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삼성의 강점을 살리되 선을 넘지 않는 절제된 경영으로 찬바람 부는 자본시장에서 자기 자리를 지켜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를 겪던 당시 5위권을 맴돌던 삼성증권은 올해 3분기, 한국투자증권에 이어 업계 2위까지 올라섰다.
“여전히 삼성이 증권업을 하는 게 맞느냐는 의문은 지울 수 없어요. 리스크를 극도로 피해야 하는 ‘관리의 삼성’이 자본시장에서 1위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삼성이 증권을 파는 일은 없을 겁니다. 팔아서 몇조원 현금을 쥐어봐야 뭐하겠어요. 어떤 일이든 손발로서 실행력이 확실한데 말이죠. 삼성증권의 역할은 딱 그정도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