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S&R 매장에서 현지 소비자가 '진로' 소주를 시음하고 있다. (사진=김성준 기자)

[필리핀=김성준 기자] #.“필리핀 증류주는 알코올 도수 30~40도가 많고 숙취가 있는데 반해 소주는 편안하고 깔끔하다. 소주를 맥주와 섞어먹는 편이라 향이 강한 과일소주보다 후레쉬를 선호한다. 깔라만시 또는 ‘모구모구(현지 음료)’ 등과 섞어먹기도 한다.”-사이린(Cyrin, 20대 남성)

#. “후레쉬에 스프라이트 섞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많이 마실 때는 후레쉬 3병 정도까지 마신다. 맥주를 마시면 더부룩한데 소주는 맛도 좋고 배부르지 않다. -제프 디말란타(Jeff Dimalanta, 20대 남성)

각각 지난 21일과 22일 필리핀 하이퍼마켓 ‘퓨어골드(Puregold)’와 회원제 창고형 할인 매장 S&R에서 ‘진로’를 구매하던 소비자들의 말이다. 세계 주류 시장에서 ‘진로 대중화’에 나선 하이트진로가 필리핀 주류 문화에 녹아들면서, 현지 소비자들의 일상적인 선택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해외시장에선 과일소주만 팔린다'는 공식이 필리핀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 한류 콘텐츠에서 촉발된 한국 소주에 대한 관심이 필리핀 주류 문화와 어우러지며 과거 과일소주를 찾던 필리핀인들의 선택은 오리지널과 후레쉬로 대체되고 있다.

28일 하이트진로에 따르면 필리핀 주류 시장에서 ‘진로’ 소주 제품은 소비자 인지도 측면에서 선점 효과를 발휘하며 선두 지위를 굳히고 있다. 현지 후발주자가 디자인, 플레이버 등에서 ‘진로’와 유사한 콘셉트로 저가 제품을 내놨지만, 가격적인 이점에도 저조한 판매성과를 거두는데 그치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한국 1위 제품’이라는 브랜드 이미지와 함께 ‘진로’ 제품 맛품질이 차별화 경쟁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필리핀 현지 다양한 유통채널에서 만난 ‘진로’ 구매자들은 공통적으로 ‘깔끔하고 부드러운 맛’을 제품 선택 이유로 꼽았다. 필리핀에서 주로 판매되는 럼주나 보드카 등 타 증류주와 비교해 독하지 않고, 수입 주류임에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점 역시 장점으로 뽑혔다. 지난 22일 S&R에서 진로를 시음한 벤 리맘보(Ben Rimambo, 60대 남성)씨 역시 “내 입맛에 과일소주는 너무 달다. 오리지날이 더 낫다”며 시음 후 후레쉬와 오리지널 묶음상품 총 8병을 카트에 담고 있었다.

국동균 하이트진로 필리핀 법인장은 “소비재는 맛이 없으면 판매가 늘 수 없다. 소비자 입맛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재구매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며 “(진로는) 이미 현지에서 판매 고도화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진로’ 판매량은 재구매 아니면 유지될 수 없는 단계까지 올라선 만큼 맛에 대한 검증은 끝났다고 판단한다”고 강조했다.

■현지·가정 겨냥 유통 전환, ‘데일리 주류’ 자리매김

필리핀 마닐라 SM 마트에 마련된 소주 매대. (사진=김성준 기자)

현지 유통채널에서 ‘진로’를 구매하는 소비자가 일상이 된 배경에는 하이트진로의 전략적인 유통 구조 전환에 있다. 하이트진로는 기존 한인 중심 유통망에서 벗어나 현지 소매와 도매 유통을 확대하고 필리핀 주류시장 약 50%를 차지하는 대형마트와 식료품 전문점을 중점적으로 공략했다. 퓨어골드, 세이브모어, SM 슈퍼마켓, 세븐일레븐 등 유통망을 다각화했고 현지 최대 주류 유통사 ‘프리미어 와인 앤 스피릿(Premier Wines & Spirits)’과 파트너십을 맺고 전국 유통 거점을 확보했다.

이에 더해 하이트진로는 한국 주류 영업을 모델 삼아 필리핀 전역에 전담 영업 인력을 배치했다. 이를 통해 매장 진열 점검, 각종 프로모션, 직원 교육 등 현장 밀착형 운영을 강화했다. 현재도 현지 매장 내 단독 진열 공간과 냉장 매대 등을 확보하며 홈파티 등 일상적 음주 상황에서 소비자 접점을 확대 중이다. 그 결과 필리핀 전역에서 진로를 구매할 수 있게 됐고, 진로는 ‘낯선 수입 주류’에서 ‘익숙한 데일리 주류’로 자리잡게 됐다.

유통채널 다각화를 통한 소비자 접근성 확대는 한류 콘텐츠 인기와 함께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필리핀 방송에서는 한국 드라마들이 시청률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전반적으로 한국 콘텐츠가 필리핀 콘텐츠보다 더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 같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소주 소비로도 이어졌다. 특히 다양한 진로 플레이버는 주류에 여러 음료를 혼합해 자신만의 칵테일로 즐기는 ‘팀플라도(Timplado)’ 문화를 저격하며 소주 소비층을 확대했다.

마리 필 레예스 하이트진로 필리핀법인 MD는 “최근에는 많은 유튜버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야쿠르트나 맥주를 섞어서 마시는 문화가 떠오르고 있다”면서 “섞어서 마실 때는 주로 참이슬 후레쉬를 음용하는 편이고, 35세 이상 소비자들은 일반 소주 자체만을 음용하는 경우가 많아 참이슬 후레쉬 판매 비중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K&L 창고에 보관중인 진로 제품들. (사진=김성준 기자)

하이트진로는 ‘데일리 주류’를 넘어 ‘친근하고 재밌는 술’, ‘힙한 술’ 등으로 진로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참여형 온·오프라인 마케팅을 확대하고 있다. 대학생 대상 오프라인 행사 ‘진로 나이트(Jinro Night)’와 K-콘텐츠 팬 이벤트, 미식 행사 ‘메가 볼(MEGA BALL)’ 후원 등 다양한 체험형 마케팅을 통해 현지 문화와의 접점을 확대하고 있으며, 팀플라도 레시피 소개, 숏폼 영상, 밈(meme) 콘텐츠 등 SNS 기반 디지털 콘텐츠로 MZ 세대와의 소통도 이어가고 있다.

브랜드 감성 측면에서도 진로는 ‘힙한 소주’로의 포지셔닝을 이어가고 있다.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DBTK(Don’t Blame The Kids)와 협업을 통해 선보인 한정판 굿즈와 SNS 캠페인은 진로를 젊고 세련된 브랜드로 각인시키는 데 기여했다. 병 컬러와 라벨 디자인을 활용한 K-컬처 감성도 브랜드 선호도 확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강정희 K&L(현지 한인 주류 납품 업체) 대표는 “과거 필리핀에 소주를 처음 알릴 때는 소주병을 직접 들고 사람들을 찾아다녀야 했지만, 이제는 현지인에게도 ‘진로’라고 말하면 바로 ‘후레쉬’라는 답이 돌아온다”라며 “현지인들이 먼저 후레쉬 달라, 오리지널 달라 하고 직접 제품을 지정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아졌으며 입점 채널이 늘어나 구매하기도 훨씬 쉬워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