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P팝 걸그룹 YGIG가 지난 22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진로라이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성준 기자)

“하이트진로의 경쟁자는 같은 주류업체가 아닙니다. 오비맥주도 롯데칠성음료도 주류산업을 같이 부흥시키고 이끌어 나갈 동반자입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주류산업에 주어진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인규 하이트진로 대표의 말입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테라와 켈리의 ‘연합작전’을 통해 국내 맥주시장 1위 탈환하겠다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던 하이트진로의 행보와는 사뭇 다른 발언인데요. 국내 주류시장 성장이 정체되고 있는 만큼 줄어드는 파이를 두고 다툼을 벌이기보단, 파이 크기를 키우기 위한 협력이 중요해졌다는 판단으로 풀이됩니다.

김 대표의 판단을 가벼이 볼 수 없는 것은 그의 전문성 때문입니다. 김 대표는 지난 2011년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뒤 14년째 하이트진로를 이끌고 있으며, 주류 업계에 몸담은 기간만 36년에 달해 대표적인 ‘주류통’으로 꼽힙니다. 그동안 회사를 이끌며 주류 시장 변화를 몸소 겪은 만큼, 산업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남다른 통찰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죠.

그런 김 대표가 최근 경쟁 상대로 점찍은 것은 문화와 레저 산업입니다. 얼핏 주류 산업과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소비자들이 넷플릭스 등 OTT로 콘텐츠를 즐기고 해외여행을 다니면 자연스레 주류를 소비할 여건이 줄어든다는 것이 김 대표의 설명입니다. 게다가 변화하는 주류 소비 문화 역시 주류 업체에게는 도전적인 환경이 됐다는 것이죠. 다양한 술을 ‘즐기는’ 소비자들을 공략하려면 예전처럼 식당과 주점 등에 제품을 공급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는 판단입니다.

실제 국내 주류 시장은 성장 정체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국내 주류업체 총 출고금액은 2015년 약 9조4000억원을 기록한 뒤 2020년까지 연평균 2%가량 지속 감소했습니다. 2022년엔 엔데믹 전환을 맞아 13.3% 성장했지만, 2023년엔 다시 1% 성장을 기록하는데 그쳤죠. 특히 하이트진로 매출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소주의 경우 2015년 95만6000㎘에서 2023년 86만6000㎘까지 감소하며 반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한식당 '삼겹살라만트'를 찾은 현지 소비자들. (사진=공동취재단)

상황이 이렇다보니 김 대표는 ‘음주’가 다양한 여가 활동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시간, 문화가 함께해야 한다고 내다봤습니다. 이 같은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주류 회사의 몫이란 생각이죠. 하이트진로는 일찌감치 이 같은 방향의 마케팅 활동을 여럿 선보여 왔습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브랜드 콘텐츠 ‘이슬라이브’가 대표적이인데요.

‘이슬라이브’는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술자리 분위기 속에서 라이브를 선보이는 콘텐츠로, 누적 조회수 3억3000만뷰를 기록할 정도로 꾸준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소주·맥주와 함께 여러 아티스트가 참여한 콘서트를 즐길 수 있는 ‘이슬라이브 페스티벌’이나, 자사 ‘두꺼비’ 캐릭터를 활용한 다양한 팝업스토어 등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를 통해 김 대표가 내놓은 전략은 하이트진로만의 브랜드 감성 구축입니다. 하이트진로가 주류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환경을 마련해 소비자에게 차별화된 경험을 전달한다는 목표죠.

이 같은 차별화 마케팅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쏠쏠한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단순 주류 제품이 아닌 ‘술자리 문화’ 자체를 수출한다는 전략은 한국 문화 열풍에 힘입어 ‘소주 세계화’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죠. 실제 필리핀 시장의 경우 일반소주 판매량이 과일소주를 앞지르면서 한국과 유사한 소주 소비 문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다양한 체험형 마케팅이 현지 문화와의 접점을 확대하는데 톡톡히 기여했죠. 해외 시장에서도 소주가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하이트진로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됐습니다.

김인규 하이트진로 대표는 “이슬라이브와 같은 브랜드 활동, 이야기를 담은 굿즈 등 접점을 넓히며 소비자와 소통해야만 음주 문화의 경쟁자들과 경쟁해 나갈 수 있다”면서 “지금까진 소비자가 (주류를) 시장과 업소에서만 음용했다 하면, 이제는 제조사들이 문화·시간·공간을 만들어 다른 경쟁자들과 경쟁하면서 주류산업이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