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민영화를 전제로 짜인 전력시장 체계는, 민영화가 멈추자 방향을 잃었다. 문제는 개편이 멈췄을 뿐 민영화를 전제로 설계된 시스템은 그대로 남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시장도 아니고 공공도 아닌 애매하고 왜곡된 구조가 전력 산업에 뿌리내리게 됐다.

■ 비싸게 사서 싸게 판다…왜곡된 내부 거래 구조

지난해 한국수력원자력은 1조6000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8년 만에 최대 실적을 냈고, 발전 5사(남동·중부·서부·남부·동서)는 매출 감소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과 순이익이 증가해 ‘대역전’을 보여줬다.

한수원은 최근 공개한 사업보고서에서 실적 개선의 주요 요인중 하나로 전력판매단가 상승을 꼽았다. 발전 5사의 실적 개선에는 계통한계가격(SMP)이 소폭 오른 것이 영향을 끼쳤다.

‘계통한계가격(SMP)’는 원가가 싼 순서대로 원자력발전과 석탄발전, LNG 발전, 유류 발전을 펼쳐놓고 전력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위치에서 전력 가격을 결정한 뒤에 발전사에 지불하는 개념이다. 현재 전력거래소는 같은 시간대에 공급되는 전력 가운데 가장 비싼 원료로 생산된 전력의 가격을 SMP로 정하고 있다.

■ 한전의 실적, 정산조정계수로 만들어진다?

발전공기업의 경우는 여기에 ‘정산조정계수’가 적용된다. 정산조정계수는 SMP에서 변동비를 제외한 후 지급할 금액을 조절하는 계수로 0.0001~1 사이에서 결정된다. 계수가 1에 가까울수록 발전 자회사는 더 많은 수익을 가져가고, 0에 가까우면 한전의 부담은 줄지만 자회사 수익은 감소한다.

정산조정계수는 한전의 전력 구입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도입된 할인율이지만 문제는 이 계수의 결정 과정이 공개되지 않으며, 수시로 조정돼 산업계의 불신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전기요금 인하 압력이 높아질 때는 정산계수를 올려 자회사 실적을 부풀리고, 한전 본사의 흑자를 줄여 여론을 관리하는 듯한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지난해 비영리 환경단체인 기후솔루션은 “정산조정계수는 한전의 실적조절 도구이자 전력시장 왜곡 수단”이라며 이를 공개하라는 행정심판을 제기했다.

■ 발전 자회사, 원래는 독립하려 했다…그러나 좌초

2001년 정부는 한전의 발전 부문을 분리하며 민간 경쟁체제 도입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정권 변화와 정책 혼선으로 민영화는 중단하는 동안 자회사들은 법적 독립만 유지한 채 사실상 한전 내부조직처럼 운용되고 있다. 이로 인해 발전 자회사들은 시장경쟁 대신 내부 고정수익 구조에 안주하며, 한전의 실적 조정 대상이 됐다. 경쟁을 위한 분리가 오히려 손익 왜곡을 확대시키는 역설로 작용한 셈이다

전력거래소가 펴낸 ‘2012 전력시장 분석보고서’는 전력시장을 “전력산업 구조개편 이행 과정에서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시장경쟁의 효과를 촉진하기 위한 시장체제”로 규정했지만 전력거래소조차 실질적으로 한전의 영향력 아래 있다. 정관에 따라 전력거래소의 이사회 구성은 사실상 한전과 자회사 출신 인사들로 채워져 있어 시장 참여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못하는 구조다.

■ 민간 발전사, ‘수익 보장’된 또 다른 수혜자

더 큰 문제는 민간 발전사의 체리피킹이다. 생산단가가 가장 높은 발전기의 가격을 기준으로 하는 SMP 구조 탓에 LNG 연료를 직도입한 민간 발전사는, 낮은 원가로 전기를 생산해 놓고 가장 비싼 SMP 기준으로 판매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 정산조정계수도 적용되지 않아,사실상 수익 상한선조차 없다. 설비 비중은 8.5%에 불과한 민자 발전사들이지만 이익 수준은 공기업과 비슷하다.

민영화를 전제로 설계했지만 멈췄고, 구조는 손보지 않았다. 그 결과 기형적 구조와 왜곡된 룰에 따라 시장이 작동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건 애매하게 남겨진 전력 시스템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