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 정기선 수석부회장(오른쪽)과 칼리드 알팔리 사우디아라비아 투자부장관 (사진=HD현대)
미국과 중국 간 관세 전쟁, 유럽의 탄소 국경세와 에너지 규제 압박이 커지면서 한국 기업의 시선은 다시 중동·아프리카로 향하고 있다. 오일머니가 여전히 꿈틀거리는 사우디·UAE는 조선·방산·에너지 분야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쏟아내고 있고, 아프리카 대륙은 인프라와 AI·디지털 전환 수요를 앞세워 새로운 시장으로 부상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반복된 유가 충격과 정치·금융 리스크의 그늘도 짙다. 이번 진출은 단순한 수주가 아닌 ‘리스크 관리와 현지화’라는 숙제를 풀어야만 지속 가능한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 ‘제2의 중동 신화’ 향한 도전나선 HD현대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이 최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다. 단순한 수주 영업이 아니라 ‘현지화·생태계 구축’이라는 전략을 전면에 내세운 행보다. HD현대와 사우디 투자부의 회담 테이블에는 주베일(킹살만) 산업항 인근의 IMI(International Maritime Industries) 조선소·엔진공장 협력이 올라왔고, 해군 함정 사업 협력도 논의됐다.
IMI는 연간 40척 이상 건조 능력, 대형 도크·골리앗 크레인 인프라를 내세운 중동 최대 조선 클러스터다. 조선소는 2026년, 엔진공장은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한다. 완공 이후 한국 조선 기술의 현지화·수직계열화가 본격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제2의 중동 신화’를 향한 서막으로 읽힌다.
■ 불꽃같은 교훈 남긴 1970년대 오일머니의 봄
1970년대 한국 기업의 중동 진출은 ‘오일머니’ 덕분이었다. 1974~1981년 8년간 해외건설 수주액은 약 434억 달러에 달했는데 그중 94%가 중동이었다. 현대건설의 주베일 산업항(1976~1979) 프로젝트는 규모·속도·품질을 인정받아 한국 건설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0년대 유가 급락, 이란·이라크 전쟁, 금융·기술 경쟁 심화로 붐은 급격히 식었다. 당시 경험은 “오일머니의 유효 기간은 짧고, 리스크는 상존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한화에어로, 중동·북아프리카 총괄법인 설립 (사진=한화에어로스페이스)
■ 방산·첨단으로 옮겨간 무게중심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중동 전략은 건설에서 방산·첨단으로 옮겨갔다. 대표적 사례가 KAI의 이라크 T-50(FA-50) 수출이다. 2013년 24대 규모, 계약액 11억 달러로 성사된 이 거래는 한국 방산의 ‘중동 데뷔전’이었다.
최근에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사우디 리야드에 MENA(중동·북아프리카) 총괄법인을 세우고 K9 자주포·레드백 장갑차 수출을 타진 중이다. 현대로템은 폴란드와 9조 원대 K2 전차 계약을 체결하며 글로벌 신뢰도를 확보했고, 이 여세가 중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방산은 무기수출 통제, 동맹국 이해관계, 지역 정세와 얽혀 있다. 단순 장비 수출을 넘어 현지 생산·MRO(유지보수)·훈련 계약, 정부 간 외교 지원까지 병행해야만 장기 성과로 이어진다.
이밖에 LG전자는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시티 내 건설중인 AI 데이터센터의 냉각 솔루션 공급 등을 추진중이다. 지난 26일 조주완 LG전자 CEO가 사우디아라비아 칼리드 알팔리(H.E. Khalid AlFalih) 투자부 장관과 만나 관련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LG전자는 1995년 사우디 셰이커(Shaker) 그룹과 에어컨 사업 파트너십 맺은 것을 시작으로, 2006년 합작법인(JV)을 세워 사우디 내에서 에어컨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30년에 걸친 견고한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중동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 두 번째 중동 신화 가능할까
중동은 지금 ‘포스트 오일’ 전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사우디·UAE·카타르는 AI·디지털 전환을 국가 아젠다로 채택해 대규모 데이터센터, AI 인프라 투자를 추진한다. 전통적 인프라(조선·건설)와 AI·디지털 프로젝트가 병행될 경우 한국 기업은 단순 제품 수출을 넘어 ‘제품+서비스+운영 패키지’까지 확장할 수 있다. 다만 데이터 거버넌스, 현지 규제, 인력 현지화 문제 등 장벽도 높다.
중동·아프리카는 여전히 거대한 시장이다. IMI 같은 초대형 클러스터와 국가 차원의 AI·에너지 프로젝트는 한국 기업에 실질적 기회다. 그러나 돈이 큰 만큼 리스크도 크다. 두 번째 중동 신화를 쓰기 위해서는 수주·투자 단계부터 현지화·금융 플랜·정부 외교 라인을 함께 설계하고 리스크 가격을 정확히 반영하는 전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