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국빈관에서 조현 외교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아시아는 한국 철강·화학·조선 산업의 출발점이자 성장 사다리였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철강·화학·조선 산업은 아시아를 성장의 무대로 삼았다. 그러나 2020년대 아시아는 더 이상 든든한 전장도, 편안한 안방도 아니다. 중국의 공급과잉, 일본의 기술전환은 이제 한국 기업을 정면으로 압박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과잉 설비와 탄소 규제 강화로 한국산 제품 경쟁력을 잠식하고 있으며, 일본은 고부가 기술 투자로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 있다.

■ 59% 쏠린 성장의 사다리 ‘중국’

2024년 기준 한국 전체 수출의 약 59%가 아시아에 집중돼 있다. 이 가운데 중국은 ‘황금어장’의 중심이었다. 1990년대 포스코, 롯데케미칼 등이 중국에 합작법인을 세우며 내수시장 공략에 나선 것이 시작이었다. 2000년대 들어 현대제철, LG화학 등도 잇따라 현지 투자에 뛰어들었고, 2010년대에는 중국의 건설·자동차 붐과 맞물려 대중 수출이 연평균 30%씩 늘어났다.

포스코는 1990년대 말 중국 장쑤성에 합작 제철소를 세우며 진출했고 이후 가공센터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롯데케미칼은 베이징과 톈진에 합작 공장을 설립했고, 현대제철 역시 2000년대 초반 자동차 강판 수요에 대응해 현지 생산거점을 확보했다. 중국은 한국 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시장이었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판도가 급격히 바뀌었다. 중국 정부의 자급률 강화 정책, 탄소중립 추진, 그리고 구조적 과잉 설비가 한국 기업에 직격탄이 됐다. 철강·화학뿐 아니라 조선업에서도 국영조선소가 초대형 선박 수주를 독식하며 한국 조선소와 정면승부를 벌이고 있다. 방산 분야는 애초부터 중국 시장이 막혀 있어 발붙이기조차 어렵다.

8월 도쿄에서 만난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사진=연합뉴스)

■ 일본, 애증의 경쟁자···여전한 기술전환의 벽

일본은 오랫동안 한국의 경쟁자였다. 자국 시장 개방성이 낮아 한국 기업들의 직접 진출은 거의 없었다. 대신 포스코는 일찍이 ‘포스코 재팬’을 세워 일본 완성차 업체에 고급 강판을 납품했고, 지금도 연간 200만톤 안팎의 대일 철강 수출을 유지한다. 현대제철 역시 현지 가공센터를 활용해 자동차 강판 공급을 이어가고 있다. LG화학은 파나소닉·도요타와 협력해 배터리 소재 공급망을 구축하며 일본을 ‘파트너 시장’으로 관리 중이다.

조선업에서는 일본의 ‘자국 발주=자국 조선소’ 관행이 철옹성처럼 유지돼 왔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글로벌 발주 다변화와 일본 조선업의 쇠락으로 균열이 생겼다. 현대미포조선은 2013년 일본 해운사로부터 MR탱커를 수주하며 일본 해운업이 한국 조선소에 발주한 첫 사례를 만들었다. 이후 삼성중공업은 2015년 일본 대표 해운사인 MOL로부터 LNG선과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을 연이어 따내며 신뢰성을 입증했다. 이는 일본 조선업계의 구조적 위기와 한국 조선소의 경쟁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강점은 여전히 기술력에 있다. 일본 철강사는 고급 제품군에서 격차를 유지하고 있으며 NEDO(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 등 정부 주도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수소환원제철, CCUS(탄소포집·활용·저장), 배터리소재 분야에서 선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조선업 역시 규모는 줄었지만 LNG선, 군수선 등 틈새 시장에서는 여전히 존재감을 보인다.

■ 과거의 황금어장···이제는 경쟁 지옥으로

중국과 일본은 더 이상 한국 기업의 ‘성장 사다리’가 아니다. 과거의 황금어장은 이제 치열한 격전지가 됐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공급기지로 가격·규제 리스크를 동시에 키우고, 일본은 미래 기술 표준을 주도하며 ‘기준 경쟁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게 주어진 과제는 명확하다. 단기적으로는 반덤핑·무역 충격을 관리하고, 중장기적으로는 합작구조 재설계, 소재·부품 단계의 기술 고도화, 친환경 투자 확대를 통해 아시아 전략을 재편해야 한다. 아시아가 더 이상 안방이 아니라면 이를 ‘다음 성장의 검증 무대’로 바꾸는 것만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