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깃발(사진=로이터 연합뉴스)

유럽은 한국 기업들에 기회이자 도전의 땅이다. 유럽연합(EU)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환경·무역 규제를 도입하고 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재생에너지(RE100), REACH(화학물질 등록·평가·허가·제한 규제) 등은 한국 기업들에 비용 부담과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 ‘규제의 벽’을 넘는 기업은 가격 프리미엄과 브랜드 신뢰를 얻는다.

까다로운 규제 몰린 EU 시장···기회와 부담 공존

한국의 전체 수출에서 유럽은 여전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대미 수출이 지난달 전년 동기 대비 12.0% 감소한 6.1%에 그친 가운데 유럽 시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이달 1∼20일 수출 가운데 유럽연합은 10.7%를 차지했다. 반도체, 자동차, 화학, 배터리 등 주력 품목이 유럽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2024년에도 반도체(1419억 달러)·자동차(708억 달러)가 호조를 보였다.

유럽은 글로벌 규제의 최전선이다. CBAM, RE10), 공급망 실사법, 배출권거래제(ETS), 포장·포장폐기물 규정(PPWR)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며 기업 활동을 압박한다. 단기적으로는 수출 비용과 진입 장벽이 높아지지만 현지 투자와 생산을 통해 ‘규제 프리미엄’을 확보하는 전략이 유럽을 공략하는 새로운 해법으로 부상하고 있다.

공급망에서 제품 생애주기까지 규제 확산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되는 CBAM은 철강·시멘트·알루미늄·비료·수소 등 고탄소 제품을 겨냥한다. 한국은 이미 EU에 철강 약 221만 톤(15억 달러대), 알루미늄 약 5만 톤(약 2억 달러)을 수출하고 있다(2021년 기준). CBAM 시행 후에는 생산 단계의 탄소배출량을 의무 보고해야 하며, EU 기준을 초과하면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 이는 한국 철강·비철 기업에 직접적인 원가 압박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RE100은 유럽 현지 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밸류체인 전반에 파급된다. 완성차 기업이 배터리 업체에, 배터리 업체가 소재 기업에 재생에너지 전환을 요구하는 구조다. 이에 대응해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 브로츠와프에 유럽 최대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가동하며 최근 폴란드 BESS 프로젝트에 배터리를 공급했다. 삼성SDI와 SK온 역시 헝가리에 현지 공장을 확장하며 RE100 기반 생산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현지 진출이 아니라 규제 프리미엄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 전략이다.

효성중공업의 420kV 초고압차단기 (사진=효성중공업)

포장재 규제 ‘보이지 않는 무역장벽’

EU의 REACH 규제는 화학물질을 EU 내에 수입·사용하기 전 반드시 등록·평가를 거치도록 한다. 한국 화학·전자 기업들은 원료 단계부터 까다로운 인증을 받아야 하며, 미준수 시 EU 시장 진입 자체가 막힌다. 또 전기전자제품 폐기물 지침(WEEE)은 제품의 설계·생산 단계에서 재활용 가능성을 고려하도록 요구한다. 삼성전자·LG전자 등은 유럽 내 리사이클링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대응 중이다.

내년 8월부터 EU는 포장·포장폐기물 규정을 전면 시행한다. 식품·화장품부터 가전·자동차까지 사실상 모든 수출 제품의 포장재가 초정밀 친환경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PFAS 금지, 일체형 뚜껑 의무, 샘플 파우치 금지 등이 핵심이다.

유럽 규제는 탄소감축에서 출발해 에너지·노동·안보·환경 영역까지 확장되고 있다. 한국 기업의 유럽 전략은 단순 대응을 넘어 글로벌 확장 모델의 시험대로 자리 잡고 있다. 유럽은 ‘규제의 시험대’이자, 성공적 현지화를 이룬 기업에겐 가장 확실한 투자 기회로 변모하고 있다.

규제 장벽 넘으면 기회의 장 열려

효성중공업은 영국·노르웨이·프랑스에 초고압 변압기를 공급하며 까다로운 품질 인증을 통과했다. 프랑스와는 장기 계약을 체결했고, 네덜란드 R&D센터에서는 디지털 전력기기 개발을 진행 중이다. 신재생에너지 확산과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로 송전망 투자가 급증하는 유럽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노르웨이에 K9 자주포 추가 수출 계약을 추진 중이고, 현대로템은 폴란드와 9조 원 규모 K2 전차 계약을 맺었다. KAI, LIG넥스원도 각각 전투기와 미사일 수출에 성공했다. 단순 판매를 넘어 유지보수·업그레이드·훈련까지 포함한 ‘서비스형 수출’ 모델이 유럽 규제와 안보 수요에 부합하고 있다.

유럽 시장은 ‘양날의 검’이다. 단순 수출에 머무는 기업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비용과 규제에 휘둘리지만, 현지화에 성공한 기업은 오히려 ‘규제 프리미엄’을 자산으로 만든다. 탄소에서 출발한 규제는 이제 에너지·노동·안보·환경으로 확장되고 있다. 한국 기업에게 유럽은 대응의 무대가 아니라 글로벌 전략을 시험하고, 동시에 가장 확실한 투자 기회를 증명하는 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