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 하고 AI 관련 정책과 뉴스거리가 쏟아지고 있다. 가히 혁명적인 AI 세상이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놀랍게도 AI가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생성형 AI의 대표격인 챗GPT가 정식 출시된 것이 2022년 말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대중화가 시작된 지 만 3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다만 그 짧은 시간에 대전환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고, 그 중에서도 바둑 동네는 훨씬 일찍부터 인공지능의 직격탄을 맞았다. 2016년 3월,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이 끝난 지 어느덧 9년이 흘렀다. 그동안 바둑계는 충격과 혼란 속에서 격변의 시간을 보냈다.

#12. 노력을 장착한 ‘신공지능’ 신진서

지난 2월 상하이에서 열린 제2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대회 5연패 위업을 달성한 한국 선수단 (왼쪽부터 설현준 9단, 신진서 9단, 박정환 9단) (사진=한국기원)

한중일 3국의 반상 자존심 대결인 ‘바둑 삼국지’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이 지난 3일 중국 칭다오에서 막을 올렸다. 20년 전 이창호 9단이 중국과 일본의 최고수들을 상대로 5연승을 거두며 대역전극을 연출한 일명 ‘상하이 대첩’으로 회자되고,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소재로도 활용된 바로 그 대회다.

‘살아있는 전설’ 이창호의 업적을 넘어 상하이 대첩을 재현한 인물이 있으니, 현존하는 ‘인간계 최강’ 신진서 9단이다. 2024년 2월 농심신라면배에서 단기필마로 6연승을 올리며 상하이 대첩을 다시 완성했고, 이 대회에서만 18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신진서가 바둑 강국 중국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압도하는 이유는 그의 닉네임 ‘신공지능’에서 알 수 있듯이 AI에 가장 근접한 프로기사이기 때문이다.

69개월 연속 한국 랭킹 1위이자, 수년 간 세계 랭킹 1위에 올라 있는 신진서는 12살에 프로 입단 후 타고난 천재성과 훌륭한 인품으로 호평을 받고 있지만, 실상은 매일같이 AI 바둑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엄청난 노력형 기사다. 탁월한 천재성에 가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수만 판의 인터넷 대국을 경험한 신진서는 인공지능을 단순한 경쟁 상대로 보지 않았다. 그는 AI를 연구 파트너로 삼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바둑을 끊임없이 발전시켰다. 경쟁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로 인식한 것이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답게 AI의 방대한 데이터를 흡수하고 분석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수를 찾아내려 애썼다. AI가 제시하는 블루 스팟(Blue spot)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바둑에 완벽히 체화시켰다. ‘신공지능’이라는 별명도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AI를 활용하여 인간 바둑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으며,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시대에 가장 완벽한 바둑 기사로 평가받고 있다.

#13. 인간다움, 그리고 바둑의 생존법

AI가 바둑계를 순식간에 장악하자, 많은 이들이 바둑의 암울한 미래를 걱정했다. 세계 최강자들조차 AI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과연 인간의 바둑이 살아남을지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었다. 그렇게 인공지능이 바둑계의 모든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사실이 있다. 결국 바둑은 사람이 둔다는 것이다.

장강명 작가는 29명의 프로기사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먼저 온 미래>에서 “바둑계에 미래가 먼저 왔다고 생각한다. 2016년부터 몇 년간 바둑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앞으로 여러 업계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앞으로 바둑계에는 AI가 앗아간 절대적 탁월함은 최소화 하되, 인간 기사들이 만들어 내는 서사 중심의 스타성과 드라마 연출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인공지능에 의해서 바둑계가 정복당한 것이 아니라, 바둑계가 남들보다 먼저 변화의 홍역을 치렀을 뿐이다. 속된 말로 매를 먼저 맞았을 뿐, 바둑의 위상이나 프로기사의 권위에 생채기가 난 것은 아니다. 앞으로 AI가 어떻게 진화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이제는 인간이 인공지능과 대결할 일이 없다는 것만은 단언할 수 있다. 고로 인간 대 인간이 맞붙는 바둑은 승부 외적인 서사, 반상의 희로애락, 다양한 내러티브가 여전히 본질이다. 그것이 바로 수천 년 동안 바둑이 존재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다운 바둑에는 AI에 존재할 수 없는 반상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패기 넘치는 신인의 떨리는 첫 대국, 베테랑의 승부에 대한 여전한 열정, 라이벌 간의 숙명적 대결 등의 이야기들은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 영역이다.

그리고 냉정하고 완벽한 AI 바둑과 달리 불완전함과 성장의 과정이 녹아 있다. 사람은 실수를 하고, 감정에 흔들리기도 하고,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역전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우리는 바둑에 매료된다. 그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장의 서사는 바둑을 단순한 게임이 아닌 인생의 축소판으로 만든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바둑의 별칭이 수담(手談)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기실 바둑계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바둑 인구가 줄고, 바둑의 인기가 시들해진 것은 알파고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을 뿐, 자체 경쟁력 약화가 근본적 원인이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시기다.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80년 전 ‘기도보국(棋道報國)’의 일념으로 보급에 앞장서며, 세계 최강국 한국 바둑을 이끈 선배들이 남긴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강헌주 PD는 바둑TV, 온게임넷(OGN), 투니버스 등에서 미디어 콘텐츠 사업을 총괄했다. 세계 최강의 한국 바둑과 e스포츠의 중심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시도했고, 2003년 프로 단체전이 전무했던 시절 한국바둑리그를 기획하여 출범시켰다. 현재 KB바둑리그는 세계 최고의 바둑리그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