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랑하는 사이(사진=화면 캡처)   [뷰어스=이소연 기자]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울림과 동시에 많은 충격을 안겼다. 드라마는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전제를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이를 뒤집었다. 남아 있는 자의 지긋지긋한 고통을 조명하더니 오히려 이것이 행복의 발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작품 속 버릴 것 없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짚고 따라가 보면 그 빛이 보인다. ■ “슬퍼만 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내막을 들여다보면 극중 하문수(원진아)와 서주원(이기우)은 원수지간이다. 서주원의 아버지는 건물 붕괴에 책임이 있고, 사고로 인해 하문수는 가족의 목숨과 평화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누구에게도 연민을 더 얹지 않는다.  서주원은 하문수의 추모공원 설계도를 보고 “너무 오픈된 거 아니에요? 자기감정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라고 말한다. 하문수는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울라고 만든 장소잖아요. 여기서는 그냥 슬퍼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한다. 이에 서주원은 “슬퍼만 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피해자들은 슬퍼만 한다, 가난한 사람이 더 착하다, 장애가 있으면 약하다, 그런 거 다 선입견 아니에요?”라며 주위를 둘러볼 필요도 있음을 강조했다. ‘피해자도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곧 가해자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범죄가 아닌) 감정에 있어 우리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리되어 있다고 단정 짓는 실수를 범한다. 심지어 하문수는 이강두와 같은 처지에 놓인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하문수는 사고 당시 자신을 먼저 내보낸 이강두, 그와 함께 있던 자신의 첫사랑 등 현실을 알아가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강두에게 아픔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주원의 대사는 정답이라고 여겨졌던 하문수의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화살이 되어 내리 꽂힐 수 있다는 양면성을 알려준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상처의 뒤편이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사진=JTBC 제공)   ■ 진통제도 듣지 않는 자기만의 감옥 이처럼 상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이들에게도 생채기를 입힌다. 하문수와 엄마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고 마음에도 없는 못된 말들로 서로를 할퀴는 장면이 그 절정이다. 순간,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엉켜 주체하지 못할 감정의 폭발을 일으킨다. 그렇게 우리는 풀어내지 못할 실타래를 더욱 잡아당기며 자신만의 감옥 속으로 숨어버린다. 이를 두고 하문수는 “아무도 가둔 적이 없는데 우리는 왜 못 나오는 걸까?”라고 읊조린다.  그 이유는 정말 ‘답도 없어서’다. 뜀박질을 하다 생긴 무릎의 상처야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나면 며칠 후에 낫지만, 마음에 한 번 남은 스크래치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해결할 방법이 안 보인다. 그래서 진통제를 먹으며 조금이나마 잊히기를 바란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진통제는 상처를 가릴 뿐, 결코 아물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큰 고통을 억누르려니 얼마나 독할까. 본질을 마주하지 않은 채 참고 견디거나 혹은 회피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탈이 난다. 강두가 진통제를 복용하다 건강에 이상에 생긴 것도, 사고 미수습자 유족이 좋은 기억도 이제는 나지 않는다면서 사진 하나에 무너져 내리는 것도 그래서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사진=JTBC 제공)   ■ ‘별 거 아닌’ 행복을 찾아, 삶을 살아가는 일  진통제를 먹으며 평생을 살 수는 없다. 쓰라리고 아파도 상처를 드러내 딱지가 앉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기와의 접촉, 외부와의 마찰이 필요하다. 이강두가 가족 같은 할멈(나문희)을 잃고도 견딜 수 있던 이유도 하문수가 있어서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는 상처를 낳지만,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용기도 상처에서 나온다. 물론 단숨에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의 전개, 하문수와 이강두(이준호)의 관계 역시 답답할 정도로 더디게 흘러간다. 서로를 조심스럽게 이해하고 스며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자체가 바로 상처의 회복 과정이 된다.  그러고 나면 어느새 앞을 가로 막고 있던 철창이 사라진다. 감옥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공간이지만, 열쇠를 갖고 있는 건 타인인 셈이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활짝 열린 문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두려울 수도 있다. 하문수 역시 “도망치고 싶다”면서도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뛰쳐나온 길 끝에는 이강두가 서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상처를 마주하고 난 뒤 남은 일은 행복해지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강두는 견디기 힘든 할멈의 죽음을 받아들였고, “있는 힘껏 행복하라”라는 유언으로 행복할 권리를 되찾았다. 그리고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다”는 하문수의 말에 “그래도 돼. 그 일이 없었으면 모두가 다 좋았을 테니까”라고 답하기까지 이른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억울해서 하루라도 더 행복해야겠다고 마한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너덜너덜해져 엉켜버린 마음을 ‘사랑’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봉합하고 풀어냈다. 그곳에는 ‘행복’이라는 새 살이 돋아난다. “별 거 아니네, 행복”이라던 이강두의 말처럼 별 거인 상처로 별 거 아닌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 그래서 삶을 ‘살아내는’ 게 아닌 ‘살아가는’ 세상으로 여기는 것. 이게 바로 작품이 우리에게 남긴 행복론이다.

'그사이' 자기만의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행복을 말하다

이소연 기자 승인 2018.01.30 13:10 | 최종 수정 2136.02.29 00:00 의견 0
그냥 사랑하는 사이(사진=JTBC 제공)
그냥 사랑하는 사이(사진=화면 캡처)

 

[뷰어스=이소연 기자]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울림과 동시에 많은 충격을 안겼다. 드라마는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전제를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이를 뒤집었다. 남아 있는 자의 지긋지긋한 고통을 조명하더니 오히려 이것이 행복의 발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작품 속 버릴 것 없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짚고 따라가 보면 그 빛이 보인다.

■ “슬퍼만 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내막을 들여다보면 극중 하문수(원진아)와 서주원(이기우)은 원수지간이다. 서주원의 아버지는 건물 붕괴에 책임이 있고, 사고로 인해 하문수는 가족의 목숨과 평화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누구에게도 연민을 더 얹지 않는다. 

서주원은 하문수의 추모공원 설계도를 보고 “너무 오픈된 거 아니에요? 자기감정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라고 말한다. 하문수는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울라고 만든 장소잖아요. 여기서는 그냥 슬퍼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한다. 이에 서주원은 “슬퍼만 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피해자들은 슬퍼만 한다, 가난한 사람이 더 착하다, 장애가 있으면 약하다, 그런 거 다 선입견 아니에요?”라며 주위를 둘러볼 필요도 있음을 강조했다.

‘피해자도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곧 가해자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범죄가 아닌) 감정에 있어 우리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리되어 있다고 단정 짓는 실수를 범한다. 심지어 하문수는 이강두와 같은 처지에 놓인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하문수는 사고 당시 자신을 먼저 내보낸 이강두, 그와 함께 있던 자신의 첫사랑 등 현실을 알아가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강두에게 아픔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주원의 대사는 정답이라고 여겨졌던 하문수의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화살이 되어 내리 꽂힐 수 있다는 양면성을 알려준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상처의 뒤편이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사진=JTBC 제공)
그냥 사랑하는 사이(사진=JTBC 제공)

 

■ 진통제도 듣지 않는 자기만의 감옥

이처럼 상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이들에게도 생채기를 입힌다. 하문수와 엄마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고 마음에도 없는 못된 말들로 서로를 할퀴는 장면이 그 절정이다. 순간,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엉켜 주체하지 못할 감정의 폭발을 일으킨다. 그렇게 우리는 풀어내지 못할 실타래를 더욱 잡아당기며 자신만의 감옥 속으로 숨어버린다. 이를 두고 하문수는 “아무도 가둔 적이 없는데 우리는 왜 못 나오는 걸까?”라고 읊조린다. 

그 이유는 정말 ‘답도 없어서’다. 뜀박질을 하다 생긴 무릎의 상처야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나면 며칠 후에 낫지만, 마음에 한 번 남은 스크래치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해결할 방법이 안 보인다. 그래서 진통제를 먹으며 조금이나마 잊히기를 바란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진통제는 상처를 가릴 뿐, 결코 아물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큰 고통을 억누르려니 얼마나 독할까. 본질을 마주하지 않은 채 참고 견디거나 혹은 회피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탈이 난다. 강두가 진통제를 복용하다 건강에 이상에 생긴 것도, 사고 미수습자 유족이 좋은 기억도 이제는 나지 않는다면서 사진 하나에 무너져 내리는 것도 그래서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사진=JTBC 제공)
그냥 사랑하는 사이(사진=JTBC 제공)

 

■ ‘별 거 아닌’ 행복을 찾아, 삶을 살아가는 일 

진통제를 먹으며 평생을 살 수는 없다. 쓰라리고 아파도 상처를 드러내 딱지가 앉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기와의 접촉, 외부와의 마찰이 필요하다. 이강두가 가족 같은 할멈(나문희)을 잃고도 견딜 수 있던 이유도 하문수가 있어서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는 상처를 낳지만,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용기도 상처에서 나온다.

물론 단숨에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의 전개, 하문수와 이강두(이준호)의 관계 역시 답답할 정도로 더디게 흘러간다. 서로를 조심스럽게 이해하고 스며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자체가 바로 상처의 회복 과정이 된다. 

그러고 나면 어느새 앞을 가로 막고 있던 철창이 사라진다. 감옥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공간이지만, 열쇠를 갖고 있는 건 타인인 셈이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활짝 열린 문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두려울 수도 있다. 하문수 역시 “도망치고 싶다”면서도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뛰쳐나온 길 끝에는 이강두가 서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상처를 마주하고 난 뒤 남은 일은 행복해지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강두는 견디기 힘든 할멈의 죽음을 받아들였고, “있는 힘껏 행복하라”라는 유언으로 행복할 권리를 되찾았다. 그리고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다”는 하문수의 말에 “그래도 돼. 그 일이 없었으면 모두가 다 좋았을 테니까”라고 답하기까지 이른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억울해서 하루라도 더 행복해야겠다고 마한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너덜너덜해져 엉켜버린 마음을 ‘사랑’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봉합하고 풀어냈다. 그곳에는 ‘행복’이라는 새 살이 돋아난다. “별 거 아니네, 행복”이라던 이강두의 말처럼 별 거인 상처로 별 거 아닌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 그래서 삶을 ‘살아내는’ 게 아닌 ‘살아가는’ 세상으로 여기는 것. 이게 바로 작품이 우리에게 남긴 행복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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