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감각 쾌락반응을 일컫는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트리거(Trigger, 심리적 자극)를 통해 ASMR을 유도하는 콘텐츠는 팟캐스트, 유튜브 등 뉴미디어를 넘어 이젠 대중매체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처럼 ASMR이 각종 콘텐츠에서 각광받는 소재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인들이 ASMR 콘텐츠를 소비하는 심리와 효과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사진=MBC 방송화면)
[뷰어스=노윤정 기자] # 직장인 이수현 씨(29.여)는 얼마 전부터 자기 전 ASMR 콘텐츠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씨는 영 잠이 오지 않는다 싶을 때면 라디오 혹은 팟캐스트를 틀어놓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러다 ASMR에 대해 알게 됐다. 귀를 파주는 콘셉트의 영상, 바삭한 과자 먹는 소리를 담은 영상 등 독특한 콘셉트의 영상들이 유튜브에 다수 올라와 있었다. 호기심에 영상을 틀어놓고 가만히 누워 있다 보면 어느 순간 잠에 빠져 있었다.
# 평소 유튜브를 자주 이용하는 조효진 씨(30.여)는 자연스럽게 유튜브에 게시돼 있는 수많은 ASMR 영상을 접하게 됐다. 그 중에서도 조 씨는 자연 소리를 담은 영상을 자주 보곤 한다. 파도 소리나 빗소리, 바람 소리 등을 들으면 마음이 잔잔해지고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잠에 잘 들지 못할 때도 ASMR의 도움을 받는다. 조 씨는 “잠들기 전에 주변이 너무 고요하면 오히려 잠이 더 달아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안식에 대한 욕구로 ASMR 콘텐츠를 찾고 있다. ASMR 콘텐츠는 일상 속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현대인들에게 편안함과 기분 좋은 쾌감을 제공하며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아직 실제 효과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현실과는 별개로 많은 사람들이 이 단순하고 일견 의미 없어 보이는 콘텐츠가 가진 긍정적인 효과를 이야기하고 있다.
■ ASMR 효과, 뇌파서 유의미한 변화 확인
팔락팔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 똑똑 수도꼭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바스락바스락 낙엽 부서지는 소리,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 이런 소리들 모두 ASMR을 유도하는 소리로 분류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소리를 들으며 편안함을 느끼고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직 과학적·의학적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아 효과가 명확히 입증된 바는 없다.
최근 ASMR 콘텐츠에 의한 뇌파 변화와 관련해 실험을 진행한 KIST 바이오닉스연구단 김래현 박사는 ASMR에 대해 “아직까진 학술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다. 의학적 기전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뇌파의 반응을 보면 흥분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 실험을 통해 ASMR 영상을 볼 때 깊은 수면 상태에서 나오는 델타파가 강화되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ASMR 영상을 보면 안정되는 효과가 있다는 건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다고 보인다”고 설명했다. ASMR이 최소한 뇌파에서는 유의미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사진=채널A 방송화면)
김 박사는 “델타파는 굉장히 서파(徐波)다. 뇌파 중 제일 느린 파다. 깊은 수면이나 고도의 명상을 했을 때 강하게 나오는데 ASMR 영상을 봤을 때도 델타파가 강화되는 현상이 있었다. 특히 전두엽과 후두엽 부분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또, 흥분을 하게 되면 베타파라는 뇌파가 나오고 눈을 감고 있거나 명상에 빠지면 알파파라는 뇌파가 나온다. 그런데 ASMR 영상을 보면 베타파가 감소하고 알파파가 증가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런 뇌파 변화를 통해 ASMR 콘텐츠를 접하면 각성이 줄어들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느낀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역시 ASMR 콘텐츠가 어느 정도 심리적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는 의견을 보였다.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송후림 교수는 “ASMR의 기전은 아직까지 미상이나 최면의 기전과 유사할 것으로 추정한다. 단조로운 자극을 계속 받게 되면 뇌파가 느려지는 이치다. 뇌파가 느려질수록 신체는 이완된다”고 설명했다. 개인에 따라 효과의 차이는 있으나 어느 정도 긴장 이완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과마음 정신과 용인수지점 윤병문 원장은 ASMR 콘텐츠를 통해 가벼운 정도의 불면증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윤 원장은 최근 젊은 세대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돼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며 “싸우거나 도망갈 준비를 하는 게 스트레스에 대한 우리 몸의 기본적인 반응이다. 사람도 동물이지 않나. 동물이 맹수, 천적을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고 스트레스 상황 시의 신체변화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맹수를) 잘 보기 위해서 검은 동자가 커지면서 각성 상태가 된다. 자더라도 선잠을 자게 된다.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본적으로 잘 못 잔다. 그때 자연스럽게 뇌가 쉴 수 있게 해주는 게 ASMR이다”고 설명했다.
윤 원장 역시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면 이걸로 다들 치료를 하지 않겠나”고 지적했다. 또한 “불면증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건 좋은데 너무 의존하는 분들이 가끔 있다. 잠들기 위한 조건을 자꾸 만드는 거다. 그런 분들은 보통 강박적인 사람인 경우가 많다. 잠을 잘 자려면 자기 나름대로 규칙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보면 나중엔 그 조건 형성이 안 되면 잠을 못 자는 경우가 생기는 거다. ASMR의 경우도 여기에 의존하다보면 그런 자극 없이는 잠을 못 자게 된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의 경우 “콘텐츠심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콘텐츠라고 하면 해석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오지 않았나”고 언급하며 콘텐츠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하고 있는 현상을 먼저 짚었다. 이어 “아날로그가 왜 편안함을 주냐면 익숙한 것들이라서 뇌가 에너지를 들여 해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옛날 물품들을 볼 때 편안해지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그런데 새로운 물품은 그게 무엇인지 해석을 시작하고 정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뇌가 작동을 한다. 에너지가 쓰이고 피곤해지는 거다. 아날로그가 편안함을 준다는 건 그런 의미다. ASMR 콘텐츠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익숙하고 에너지를 덜 쓸 수 있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현대인들이 너무 신경 쓸 게 많기 때문에 휴식을 도와주는 콘텐츠로서 ASMR에 주목을 한 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게 절대적인 건 아니다. 한편으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적극적으로 팔로우 업 하는 분들도 있다. ASMR 유형의 콘텐츠가 그동안 배제돼 왔다가 주목을 받는다는 차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거다. 이렇게만 가면 문제가 많지 않겠나. 잘못하면 현실도피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