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토 시장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사실상 금리인상이 종료되면서 ‘크립토 윈터’도 끝났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단순히 가상화폐의 가격 상승을 넘어 토큰증권 시장의 개화, 가상자산법의 마련 등 근본적인 변화의 조짐도 나타난다. 변화는 기회의 다른 이름이다. 뷰어스는 세 차례에 걸쳐 크립토 시장에 부는 격변의 상황을 살펴봤다. -편집자 주
1. 전통금융의 달라진 시선
2. 다가오는 토큰증권 시대
3. 가상자산법이 그릴 미래
급진적 무정부주의자가 아닌 이상, 현대 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을 무시할 순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앞선 국가체제로 평가받는 민주공화정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작동 매커니즘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경우 이는 최상위법인 헌법에 명시돼 있다. 룰 없이 스포츠 경기를 상상하기 어렵듯 법률 없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2009년 비트코인의 등장은 ‘국가의 역할’에 대해 근원적인 의문을 던지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인류 최초의 탈중앙화된 디지털 통화를 창시한 사토시 나카모토는 중앙은행을 포함, 국가의 역할이 필요 없는 ‘P2P(Peer to Peer)’ 거래 시스템을 창시했다. 탈중앙화는 곧 권력 분산을 의미하고 이는 무정부주의적 사고에 가깝다. 국가의 간섭과 통제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이는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사람들은 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기술에 흠뻑 빠져들었다. 하지만 각국 정부는 비트코인 열풍을 애써 무시했다. 비트코인이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평가절하하는 일은 2023년인 지금도 흔히 접할 수 있는 광경이다. 반짝 빛나다 사그라질 줄 알았던 비트코인 열풍은 하지만 이후 수없이 많은 알트코인이 등장하며 새롭게 진화해 가고 있다. 이제 각국 정부도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자산을 제도권으로 흡수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중이다.
■ 역사의 새 페이지를 열었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가상자산 생태계에도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대부분은 인간의 과도한 욕심이 문제였다. 비트코인이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긴 했지만 내용을 적어나가야 할 사람들의 머릿속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다. 특히 일확천금을 노리고 사기에 가까운 ICO를 감행하는 불나방들이 너무 많았다. 시장은 오염됐고, 오염은 불신을 낳았다. 누군가는 큰 이익을 봤지만, 꽤 많은 이들은 큰 피해를 봤다.
지난해 테라·루나 사태나 FTX 붕괴는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줬다. 보다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사례는 지난 3월 발생한 ‘강남 납치살인 사건’이다. 가상자산을 둘러싼 추악한 실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금까지 발표된 수사결과를 종합해 보면 국내 5대 거래소 중 한 곳인 모 거래소는 브로커로부터 뒷돈을 받고 자격 미달의 코인을 무더기로 상장시켰다. 주가조작 사건과 마찬가지로 세력의 시세조종 작업이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알력 다툼이 생겼다. 그리고 결말은 청부살인. 1심에서 재판부는 핵심 피의자들에 무기징역 등 엄벌을 내렸다.
가상자산 투자 열풍이 불었던 2021년 상장폐지된 가상자산만 814개에 달했다. 열풍이 식은 지난해에도 269개가 상장폐지됐다. 하루 평균 1~2개 꼴로 상장이 폐지된 것이다. 투자유의 지정 자산도 지난 2년간 1000개가 넘었다. 특히 지난해 국내 유통 625개 가상자산 중 특정 거래소에 단독 상장된 자산은 389개로 62.3%를 차지했다. 그 중 시가총액 1억원 이하 가상자산이 132개나 됐다. 실체 불명의 부실·불량 가상자산이 대량으로 상장됐고, 가격폭락 및 상장폐지로 많은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 가상자산법 제정...시행은 내년 7월
국가의 간섭과 통제가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가장 빠르게 대응한 곳은 유럽이다. EU는 세계 최초로 가상자산 법률 MiCA(Markets in Crypto-Assets)를 올해 통과시켰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격적인 규제보다 단계적인 규제로 접근하는 중이다. 2021년 3월 특금법(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개정을 통해 최초로 규제장치를 마련했다. 주요 내용은 가상자산사업자 신고제 도입, 자금세탁방지 및 투자자보호 등이었다. 하지만 특금법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지난해 ‘가상자산법 제정’ 논의에 들어갔다.
민관합동 TF에서는 ▲점진적·단계적 추진 ▲동일기능·동일위험·동일규제 원칙 ▲글로벌 정합성 등 3가지 가상자산 규율체계 구축방향을 수립했다. 하지만 이용자 보호가 시급하므로 장시간 소요되는 국제기준의 정립을 기다리기보다 필요 최소한의 규제체계를 먼저 마련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에 지난 6월 30일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가상자산법)’ 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본격적인 시행은 공포 1년 후인 내년 7월부터다.
제정안의 주요 내용은 ▲가상자산 이용자 자산보호 ▲가상자산시장의 불공정거래행위 규제 ▲가상자산시장·사업자에 대한 금융당국의 감독·제재 권한 등을 담고 있다. 특히 가상자산사업자의 고유재산과 고객 예치금의 분리, 이용자 위탁 가상자산의 인터넷 분리 보관(콜드 월렛), 해킹·전산장애 등 사고에 따른 책임 이행, 거래기록 15년간 보존 등 이용자 보호 내용이 법안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10일에는 ‘콜드 월렛 80% 이상 의무보관’ 등의 내용이 담긴 시행령을 입법예고하기도 했다.
■ 새로운 회계지침, 합수단 출범으로 보조
정부는 가상자산법 제정과 함께 ‘가상자산 회계지침’도 마련했다. 가상자산을 발행하거나 보유한 기업이 회계처리를 명확하고 일관되게 하도록 강제한 것. 공시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가상자산에 대한 주석공시 의무화도 도입했다. 관련 기업은 앞으로 가상자산 거래·보유 정보를 상세히 공개해야 한다. 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 고팍스 등 국내 5대 가상자산사업자뿐만 아니라 해외 자회사를 통해 가상자산을 발행한 카카오, 위메이드, 넷마블, 네오위즈홀딩스, 다날 등도 해당 지침을 따라야 한다.
불공정거래행위 규제와 관련해선 ‘가상자산범죄 합동수사단’ 출범이 눈에 띈다. 정부는 지난 7월 검찰, 금융감독원, 금융정보분석원, 국세청, 관세청, 예금보험공사, 한국거래소 등의 조사·수사 전문인력 30여명으로 구성된 수사단을 금융·증권범죄 중점 검찰청인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 설치한다고 밝혔다. 합수단은 ‘부실·불량 코인 발행·유통’ 과정을 분석해 범죄혐의를 밝혀내고 신속한 수사를 통해 시장의 위험요인을 제거하는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정부는 “2030세대를 중심으로 600만명 이상이 참여해 매일 3조원 넘게 거래되는 가상자산은 이미 주식에 버금가는 투자상품임에도 법령과 제도가 완비되지 않아 시장참여자들이 사실상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다”며 합수단 출범 배경을 설명했다. 이로써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정신에서 출발한 가상자산 시장은 중앙의 촘촘한 통제 하에 놓이게 됐다.
■ "이중적 관점 해소 필요...규제로 시장활성화"
현 시점에서 가상자산법 시행이 시장에 미칠 영향력에 대해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이상과 현실의 불균형에 대해 지난달 13일 ‘업비트 D 컨퍼런스(UDC) 2023’에 패널로 나선 니잠 이스마일 에티콤 대표 겸 설립자(전 싱가포르통화청 시장행위정책 부서장)는 “규제 당국이 토큰화의 중요성은 인지하면서도 일반 가상자산 시장은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싱가포르의 상황을 소개했다. 투자자 피해를 지나치게 우려해 이중적인 관점이 생겨났다는 문제제기였다. 이는 한국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자자 보호나 불공정거래 방지 차원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됐다는 점은 분명 긍정적인 요소다. 하워드 피셔 모세앤싱어 파트너(전 SEC 수석재판 변호사)는 “디지털자산이 전통자산만큼 규제를 받게 되면 시장규모가 커지면서 활성화될 것”이라며 규제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가상자산이 제도권으로 편입되면서 보다 넓고, 건전하며, 활발한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누구의 허락도 없이, 거래 당사자 간 신뢰 없이도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은 비트코인이 인류 역사상 최초였다. 각종 규제가 도입돼도 이런 혁신성은 심화·발전될 수 있을까.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시점이다.
에밀리 파커 코인데스크 전무이사가 UDC 2023에서 소개한 코인 시장 규제&정책 트렌드. RWA 토큰화, 아시아 시장 대두, 스테이블코인 규제 방향, CBDC 실험, 비트코인 현물 ETF 등장 등을 꼽고 있다.(사진=두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