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통계청에서 ‘국민 삶의 질 2024’ 보고서를 발간했다. 짐작대로 매우 좋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삶의 만족도, 2019년 이후 첫 하락’을 암울하게 조명했다. 지난해 OECD의 세계행복보고서 발표(38개국 중 33위)를 다시 확인시켜 준 결과이기도 했다. 무엇이 문제일까는 생각할수록 복잡해 질문을 바꿔본다(대안 없는 비판을 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노력해야 할까.

‘국민 삶의 질 2024’에 대한 기사들을 일별해 본다. 어느 신문사에서는 ‘돈 없을수록 불만족’이라고, 다른 신문사에서는 ‘행복도 빈익빈 부익부’로 헤드라인을 뽑았다. 먹고 살 걱정부터 앞서는데 행복할 리가 있겠냐마는 모든 국민의 부를 몇 단계 높이는 방안은 나랏님도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필자와 같은 범부가 고민하기엔 너무 큰 주제다. 나비의 날개짓과도 같은 일상의 작은 혁신이 어느 날 폭풍 같은 변화를 몰고 오리라는 믿음을 갖고 사는 필자로서는, 마침 근자에 직장 승진 인사도 있었고, 당연히 만족한 이들보다는 아쉬워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았기에(명부상 탈락한 이들이 6배, 하고 싶은 이들까지 하면 십 수배는 되었으니 당연한 집단 감정이리라) 직장생활 만족도로 범위를 좁혀 고민해 보고자 한다.

■항아리 속 제로섬 게임은 공멸

필자가 나고 자라며 본 인구 그림은 아주 안정적인 피라미드형이었다. 그런데 작년 지방 소멸 위기 기사를 보니 2024년 46.1세 중위연령 바로 위가 가장 불룩하고 아래로는 거의 45도 각도로 좁아지는 항아리 그래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사회 초년생인 Z세대(GenZ)와 그 바로 위 밀레니얼 세대에게 승진은 동년배와의 치열한 경쟁의 문제를 넘어 이고 지고 있는 윗세대를 밀어내야 하는 산 넘어 산의 전투다. 일부 목표지향적이고 경쟁력 있는 젊은이들은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는 게 눈앞 고지를 쟁취하는데 효과적일지 그간 선배들에게 들은 경험담을 종합해 감각적이고 빠른 머리를 돌려 계산해 본다.

직급별 연봉 차가 큰 직장이라면, 워라밸은 접어두자. 그리고 장기적, 본질적으로 중요한 일은 생각하지 말자. 항상 다급한 게 중요한 것을 이기는 법이니까. 조직이 다급할 때 그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서 나의 역할을 표시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점심시간, 퇴근시간 가리지 않고 관계를 돈독히 하고, 사내 정치에 열심히 투자해야 한다. 이 같은 시뮬레이션은 필자의 경험에 입각한 개인 견해만은 아니다. ‘룬샷’이 폭발하는 조직을 연구한 사피 바칼이 ‘관리범위’가 크고 ‘연봉상승률’이 높은 조직의 합리적인 직원이 행동하는 설계 공식에 입각한 결론이다. 결재 단위가 층층시하이고, 직원이 수행한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에 따라 받는 인센티브나 기여도 인정이 직급에 따른 연봉상승분에 턱도 없는 조직, 아니 어쩌면 인센티브도 승진 트랙과 발맞춰 나가는 조직에서는 동기부여의 선택지가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2년마다 반도체 집적도가 두 배로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만 떠올려도 조바심이 드는데, 이마저 지난 세대의 속도가 되었다. 그 30배가 넘는 속도로 AI가 발전하는 첨단의 시대에서 쫓기듯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시대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한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는 신속한 문제해결 기반 프로젝트가 일상인 바, 협업을 위한 소통이 아닌, 승진을 위한 사내 정치가 주류 문화가 되는 순간, 그 조직은 빠르게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으로 달려가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혁신에는 가치 공감과 다양한 협력이 필수

혁신에 진심인 이들에게 ‘레드벌룬 챌린지’는 널리 알려진 사례다. 미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팀이 미 전역 10개 공원에 10개의 빨간색 기상관측 기구를 띄운 다음 빨리 발견한 팀에 4만달러의 상금을 주는 이벤트를 열었다. 우승은 MIT팀이 차지했는데,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게 설계한 ‘지분나누기’ 방식으로 당초 1주일 예상을 깨고 8시간 52분 41초만에 미션을 완수했다. 이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각자의 강점을 발휘해 서로 협력할 때 최대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양한 이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지혜를 모으고 협력해 나가는 것이 가치 창출이자 혁신의 과정일 것이다.

창조와 혁신을 지향하는 조직은 소모적인 단계와 갈등을 줄이고, 조직 미션에 대한 공감대는 넓혀 조직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 되는 프로세스를 우선적으로 설계한다. 필자는 가끔 무거운 사명과는 별개로 관례에 익숙한 공조직에서의 한계를 느끼는 바, 결재 단계가 많고, 프로젝트 중심의 인센티브는 거의 없거나 미미한 체계 속에 안주하고 있다는 죄책감마저 든다. 항아리의 좁은 아랫단을 차지하는 우리 MZ세대들과 함께 층층의 구조 속에서 단지 ‘연봉’과 ‘직급’만으로 어떻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나와 같은 관리자들이 혁신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패기와 열정은 엄청난 무기가 맞다

“딥시크의 핵심 인재는 대부분 신입이거나 경력 1~2년 정도의 젊은 직원이다!”(량원펑)

“경험은 결코 늙지 않으며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Experiences never get old. Experience never goes out of fashion)”는 영화 인턴의 명대사는 최첨단 기술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혁신기업의 모든 상황을 다 포괄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 세대로서 아프게 절감한다. 조화로운 경쟁력을 가진 조직의 중요성이야 이견이 없겠으나, 가능·불가능을 따지지 않는 패기와 때로 돌파형 혁신(Breakthrough)을 불러오는 무모할 정도의 열정은 사실 젊은 층의 특권일 때가 많다. 최근 중국에서는 IT기업은 물론 일반 회사들까지 35세 이상 구조조정 회오리에 휩쓸리는 가운데, 공무원시험 응시자격까지 35세 미만을 요건으로 내걸어 ‘35세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위헌적 처사이지만, 그만큼 ‘열정’을 생존 역량의 필수 요건으로 간주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린 이 젊은 인재들을 아까워하고, 그 기와 가능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마땅히 고민해야 한다.

한때 실리콘밸리의 창업과 혁신 문화에 관심이 있던 적이 있었다(대략 십 수년 전으로 기억한다). 그때 만난 이들에게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명함이 여러 개라 서로 소개 인사를 나눌 때 논의하는 주제에 맞는 명함을 골라서 주더라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소위 잡호핑(Jop-hopping)이라 하여 매우 이직이 잦고 회사를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연봉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들에게 삶의 질을 결정하는 원동력은 자기 발전의 기회와 가능성이라(물론, 그 기회를 통해 몸값을 계속 올려가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처럼 회사의 규모(대기업)나 안정성을 보기보다는 동료(peer)그룹을 먼저 보고 이들과의 협업이 자신의 경쟁력을 얼마나 높여줄 것인지가 매우 중요한 선택 기준이었다. 그만큼 일은 단순 생계의 수단이 아니며, 자신의 발전가능성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간절하다 여기고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내친김에 최근 MZ세대의 직장 만족도 및 이직에 대한 조사들을 살펴보았다. 결론은 나라와 문화 차이를 가리지 않고 비슷했다. 아마존과 Workplace Intelligence의 ‘2025 밀레니얼 및 Z세대 조사’에 대한 포브스(Fobes)의 보도에 따르면 이들의 이직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성장 기회 부족’으로 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잡코리아가 2024년 직장인을 대상으로 ‘직장생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직장에서 ‘가치’를 느끼는 요인에 대해 경력 고저를 막론하고 ‘급여’를 1위로 꼽았으나 2위는 갈렸는데, 10년 이상의 직장인들은 ‘워라밸’을 2순위로 답한 반면, 저연차 직장인일수록 ‘성장 가능성’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드러냈다. 저출산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조직들이 젊은 인재들의 ‘성장 가능성’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다. 아울러 과연 이 문제를 교육, 시간, 배려 등 복지로 풀 것인가, 아니면 본질적인 일로 내재화할 것인가는 또 다른 중요한 문제다.

■조직과 개인이 함께 발전하는 혁신 문화

직장인 소셜 플랫폼 ‘블라인드’에서는 매년 ‘직장인 행복도 조사’, 일명 ‘블라인드 지수’를 조사한다. 이 조사의 대상 대다수(54%)는 Z세대와 후기 밀레니얼 세대인데, 이들의 행복감을 좌우하는 것은 ‘워라밸’이 아닌, ‘업무 의미감’(회사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 인생의 방향과 일치한다고 느끼는 정도)이었다. 직급이 낮을수록 스트레스 지수가 높고 직무만족도가 낮은 것은 결국 일에 대한 자기 주도성과 그 일의 결과에서 자신의 기여도에 대한 ‘의미’를 발견해 내는가 하는 주체성의 정도 차이 때문 아니겠는가.

자기결정이론을 개발한 미국 심리학자들(리처드 라이언과 에드워드 데시) 역시 자율적 동기가 인간의 성공과 성취의 기본적 촉매라고 주장했다. 전 세계 인재의 집합소라는 구글이 ‘직원 열정 프로젝트’를 적극 후원하는 것도 직원의 자기주도적 프로젝트가 업무 의미감을 높이고 이것이 지속 가능한 행복감의 동력이 되어 그 성과가 조직의 혁신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 아니겠는가.

조직의 특성과 처한 현실은 제각각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의 열정을 되살릴 다양한 프로젝트와 그에 대한 큰 인센티브를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인 것 같다.

■ 법학박사로 국회, 청와대, 공공기관을 두루 거치며 교육, 과학기술, 창업 정책을 다뤘다. 교육정책에 매진했을 당시에는 하나의 정책에 얼마나 많은 이해와 갈등이 얽히고설킬 수 있는지 깊이 체득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재직 시절엔 ‘창의교육’과 ‘교육기부’에, 창업진흥원에서는 ‘창업’과 ‘혁신’에 꽂혀 정부정책과 현장 사이에서 동분서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