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자취를 하며 학업, 창업, 아르바이트에 요가까지…. 혼자만 바쁜 딸은 심지어 한 살 반 강아지 언니 노릇까지 한다(물론 혼자 사는 사람이 반려견을 키우는 건 ‘절대 안된다!’고 필자네는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이번에도 저지르고 통보하고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딸의 일상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룽지(누룽지색 시바견이다) 산책 포함 두어 시간 동안 놀아 줄 사람 찾는다고 당근에 올렸는데 몇 명이 지원했게?”
“한 10명?”
“30명. 얼마 준다고 했게?”
“3만원?”
“3000원! 게다가 홈캠 보니 그 여학생이 산책시키고 들어와서 한 시간 넘게 장난감 던지고 너무 열심히 놀아주더라.”
“헐…!”
(MBTI 검사에서) T형 X세대 필자로선 바로는 이해 불가 상황이었다.
또 다른 어느 날 밤, 톡이 연속해서 울렸다.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너무 아프고 두드러기가 난다는 것이었다. 일단 약국가서 약 사 먹고 심하면 다음 날 병원을 가라 했다. 한 40~50여 분 지났을까. 대화 캡처 사진이 올라왔다. “도저히 꼼짝도 못 하겠어서 약 좀 사달라 올렸더니, ○○역을 지나는 여학생이 사다 줬어.” 다행히 다음 날 별일이 없었고 병원은 가지 않았다 한다.
더워진 어느 날 오후, 카페인 음료만 마시면 배탈이 나는 딸에게 아르바이트 회사 동료가 말차라떼를 사다줬다며(이것도 딸에겐 위험 음료다) “당근에 나눔 올렸더니 근처에서 바로 와서 가져갔어~”라고 한다.
이쯤이면 멀리 있는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 긴요한 공동체다. 문득 직업의식이 발동해 물었다.
“넌 정부를 더 믿냐? 당근을 더 믿냐?”
대답은 예상하시는 대로다.
“뭔 소리래. 당근 당근이지!”
■ 정부보다 당근을 더 믿는 MZ세대
25년간 세계 신뢰도 조사를 해온 글로벌 PR컨설팅 회사 에델만이 올 초 발표한 신뢰도 결과는 대화처럼 웃고 넘길 수준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사회 불신(전체 신뢰도 지수 41%)’이 심화되었지만, 특히 정부와 미디어에 대한 신뢰가 크게 하락했고, 그 중 한국은 28개국 중 27위의 최저 신뢰도 국가로 나타났다. 에델만 측에서는 ‘신뢰가 있으면 낙관주의가 불평을 능가한다’며 신뢰 회복을 위한 몇 가지 방안을 권고했는데, 그 첫째가 ‘불만 사항을 해결하라’는 것이다. 당연하면서도 늘 어려운 주문이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인가? 딸이 애용하는 플랫폼을 비롯해 어느 사이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기업들, 특히 끊임없이 혁신하는 스타트업들의 문제해결 사례들을 보면 신뢰 회복이 요원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친 김에 ‘당근○○’의 성공 요인을 분석해 봤다. 우선, 성공한 대다수 플랫폼 기업들이 그러하듯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신뢰를 지키고 키우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플랫폼에서 행위자들은 서비스와 상품에 대한 ‘피드백’을 중시한다. 그것이 ‘별점’이 되었든, ‘고객 문의하기’가 되었든 만족과 불만을 바로바로 수용하고 반영하는 시스템이 기본인 것이다. (공공기관 종사자로서) 반성적 사고를 해본다. 우리는 얼마나 빨리 민원 사안을 처리할까. 결재를 타는데 최소 하루가 걸린다. 법적으로는 7일에서 14일 이내다. 배송플랫폼 등 전자상거래 기업 같으면, 고객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도 남을 시간이다. 물론 정부와 공공기관 종사자들은 계획에도 없는 잔업만큼이나 할 말도 많다. 결국 개인의 진정성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인 것이다. 전 세계 정부가 디지털 정부 혁신을 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영국은 올해 초 ‘험프리(1980년대 영국 시트콤에 등장한 가상 관료 이름)’ 시스템을 출시했고, 스코틀랜드에서는 험프리와 같은 ‘컨설트’ 도구를 설치해 2000여 개가 넘는 질의응답을 검토하고 처리했다 한다. 이 AI 시스템을 통해 공무원들은 매년 7만5000일 분량의 수동 분석 작업을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둘째, 지역 인증을 통해 지역 기반 커뮤니티를 활성화하고 그 신뢰도를 높였다는 점이다. 생태계 활성화 정책을 고민해 왔던 필자로서는 ‘역시 공공보다 민간 기업의 문제해결력이 뛰어나구나’를 실감한다. 좀 뜬금없긴 하나, 우리 법에는 ‘보충성의 원리’란 것이 있다. 상위 단위(국가나 중앙정부)는 하위 단위(개인, 가족, 지방정부 등)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에만 보충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원리로, 문제해결의 주체는 당사자와 당해 소속 집단이 우선이란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위험 신호 중 하나는 지역이 급속도로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민간과 협력해 지역이 우선(결정)권을 가지고 주민 참여로 문제해결력을 키우고, 지역의 특성을 살려 글로컬 도약을 밀어줘야 하는 이유다.
셋째, 시대적 변화와 트렌드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가치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은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며 생존과 직결되는 가치다.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ESG를 무시하는 기업은 투자도 받지 못한다. 따라서 중고 물품 거래나 지역 공동체 기반의 문제해결 서비스는 상당한 공감을 받는 공유가치라 할 만하다. 또한 ‘당근’은 MZ세대의 공감을 얻어 그들의 참여가 높다. 그러니 돈을 떠나 ‘반려동물에 진심’인 가치를 공유하는 지역 내 또래를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특정 기업을 빗대어 살펴보았으나, 새 정부 출범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공공(정부)의 혁신’과 ‘신뢰’의 문제는 그 어느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여겨져 ‘신뢰받는 혁신 정부’를 희망하며 좀 더 살펴보겠다.
■ 신뢰를 줄 수 있는 역량과 공공 혁신
신뢰받는 기업은 경쟁사보다 최대 400% 더 높은 성과를 내고, 브랜드를 신뢰하는 고객은 재구매율이 88% 더 높다는 사실, 그리고 고용주를 신뢰하는 직원의 79%가 업무 의욕이 더 강하고 이직율은 더 낮다는 딜로이트의 조사 결과 외 더 많은 연구 결과들을 제시하지 않아도 신뢰의 중요성에는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과 그것을 우선시하고 달성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특히 복잡도가 극도로 높아지는 세상 속 신념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우선’ 가치를 도출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배신(?)일 것이며, 경제적 불확실성과 양극화가 커지는 환경에서 나의 불안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정부와 공동체에 대해 낙관적 신념을 가지라는 것이 자칫 나에 대한 불신과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역설적 상황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공정성, 투명성, 일관성, 진정성 등과 같은 신뢰 확립의 요소들에 앞서 이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 속 최적의 균형점과 최대 다수의 만족을 도출할 ‘역량(능력)’이 무엇보다 긴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오늘날 기업들에게는 고객의 신뢰를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인 것은 없다. 물론 위기에도 흔들림 없이 지키는 ‘가치’는 있다. 이런 기업들이 충성 고객을 확보하고 여하한 위기에서도 살아남는다. 친환경 경영과 동시에 품질 경영을 달성한 파타고니아가 그렇고, 타이레놀 독극물 사건에도 불구하고 전량을 리콜, 신속한 피해자 위로를 한 존슨앤존슨이 그러했으며, 20세기 말 공업용 쇠기름 파동으로 존폐의 위기를 겪다(이후 무죄 판결에도 국가 상대 피해보상을 제기하지 않고) 품질관리 시스템을 대폭 강화해 최근 불닭볶음면으로 글로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삼양식품이 그러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투명한 정보 공개와 신속한 대응, 그리고 근본적이고 미래지향적 혁신을 했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공공의 혁신에서 여전히 부족한 점들이다.
■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 혁신을 혁신해야
정부 부처나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이들에게 ‘혁신’만큼 식상한 단어는 없다. 해가 바뀌면 업무계획을 혁신하고, 장관이 바뀌면 조직을 또 혁신한다. 5년에 한 번 정권까지 바뀌면 사업도 조직도 가치(우선순위)도 다 혁신한다. 그런데 고객은 동일하다. 무슨 기준으로 혁신하는 것일까.
공공기관의 일원으로서 가치와 이념의 문제는 논외의 것으로 하고, 시대의 흐름과 기술의 변화를 적극 수용하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능함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복잡하고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사람(국민)들의 니즈와 문제들은 시시각각 변해 개인의 합보다 많고 그 수위도 다양하다. 그러니 서비스가 고도화되고 개별화되지 않는다면 찾기도 전에 나의 취향대로 상품과 서비스를 추천하는 첨단에 이미 익숙한 국민들을 어떻게 만족시키고, 신뢰까지 받을 수 있겠는가. 아울러 정원은 총액 인건비에 묶여 몇 명 증원도 어려운데 기존 사업은 기본으로 가져가면서 ‘혁신’할 때마다 늘어나는 새 사업들을 처리해야 하는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는 무슨 수로 개별화된 서비스 지원을 한단 말인가. 사업이라도 조금 변경할라치면 민원이 무서워 혁신 아닌 개선도 꺼려지는 것이 현실이다.
AI 시대에 과학기술계에 자주 회자되는 ‘모라벡의 역설’이란 것이 있다. ‘인간에게 쉬운 것은 컴퓨터나 로봇에게는 어렵고, 반대로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기계에는 쉽다’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많고 복잡한 것을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이미 현실로 다가왔다. 전 세계 정부에서 디지털 정부(GovTech)를 통해 혁신을 추동하는 이유다.
■ 에스토니아 정부의 혁신 주체는 ‘민간’
디지털 유토피아 정부라 칭해지는 에스토니아에서는 국민투표부터 의료기록 확인, 사업체 등록 등 모든 서비스 및 정부와의 상호작용을 온라인으로, 그것도 대개 몇 분 만에 처리한다. 에스토니아에서는 국민의 3분의 1이 온라인으로 투표하며, 정부는 관료주의 축소로 800년 간의 노동시간이 절약되었다고 추산한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해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나라가 이런 첨단 정부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물론 유연하면서도 강력한 리더십도 한 몫 했을 것이나, 필자가 주목하는 바는 혁신의 핵심 주체다. 이 디지털 유토피아는 관료가 아닌 기업가와 엔지니어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사이버네티카(Cybernetica), 델이엠씨(Dell EMC), 에릭슨, 오픈노드, 텔리아 등 민간 기업들의 협력과 주도적 역할로 탄생한 것이다. 그렇기에 에스토니아의 정부 서비스는 끊임없이 진화해 최근에는 전자정부를 넘어 ‘서비스로서의 정부(Government as a Service: Gaas)’를 표방한다. 이는 공공행정이 민간 혁신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는 모델로 에스토니아에서는 10년 안에 ‘완전히 개인화된 국가’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정부도 ‘디지털플랫폼 정부’를 기치로 내세우고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나 복지 분야에서 별도 서류 없이 시행 등) 몇 가지 상당한 진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부처를 뛰어넘어 정부 서비스 전반을 연결하고, 모든 공공행정에 AI가 도입되는 것은 과연 언제쯤 현실화될 수 있을까. 공공의 혁신이 더딜 수밖에 없는 것은 자칫 잘못될 경우 신뢰의 위기가 정부 불신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로 변화에 보수적인 탓도 있겠지만(여기서도 신뢰를 잃을까 우려해 신뢰를 못 받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민간의 절실함이 부족하거나, 어떻게 해서든 해결 방안을 찾는 민간의 문제해결력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첨단 기술력과 속도가 관건인 문제들은 민간을 앞세우고 정부는 신뢰 강화를 위한 공정과 보안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것은 어떨까. 민관협력이란 말로 온갖 위원회를 만들어 이름 좀 있다는 민간 전문가를 위원으로 참여시키고 회의 좀 한다고 내실 있는 협력과 혁신이 바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민간이 이미 앞서 있고 잘할 수 있는 일은 민간에게 맡기는 것도 적극적으로 검토해 봐야 하지 않을까.
정부혁신의 글로벌 트렌드 역시 이러한 기류인 바, OECD에서 지난해 전 세계 83개국, 약 800건의 혁신 사례를 분석해 발표한 ‘정부혁신 글로벌 트렌드’ 보고서에서도 시민 중심, 디지털 전환, 데이터 활용, 맞춤형 서비스, 시민 참여 등 5가지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아울러 보고서에서는 신뢰를 얻고 사람들의 변화하는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공공 서비스는 가치를 제공하고 삶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정부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서비스를 활용해야 한다’는 손에 잡히는 팁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신뢰’란 것이 AI의 코딩과 실행 버튼으로 어느 날 일시에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과정을 규명할 수 없는 것은 믿지 못하는 본성이 있다. 과정을 일일이 투명하게 설명하는 것이 신뢰 구축의 기본인 것이며, 더 나아가 힘 있는 부처와 기관부터 (데이터의) 벽을 허물고 영역 이기주의를 뛰어넘는 것이 우리 정부 혁신 성공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 법학박사로 국회, 청와대, 공공기관을 두루 거치며 교육, 과학기술, 창업 정책을 다뤘다. 교육정책에 매진했을 당시에는 하나의 정책에 얼마나 많은 이해와 갈등이 얽히고설킬 수 있는지 깊이 체득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재직 시절엔 ‘창의교육’과 ‘교육기부’에, 창업진흥원에서는 ‘창업’과 ‘혁신’에 꽂혀 정부정책과 현장 사이에서 동분서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