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무더위가 옅어지고 공기는 서늘해졌다. 나무의 잎은 어느새 가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계절은 인간의 뜻과 무관하게 변한다. 세상의 흐름도 그렇다. 공급자가 정한 질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행정과 기업 역시 이 흐름을 피할 순 없다.
행정과 기업은 오랫동안 '공급자 중심' 사고에 갇혀 있었다. 정책은 위에서 정하면 국민이 따를 것이라 기대했고, 기업은 제품만 내놓으면 소비자가 사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대는 그 믿음을 오래전부터 거부해 왔다. 한때 잘 팔리던 브랜드가 소비자의 요구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순식간에 시장 점유율을 잃고 저물어간 사례는 무수히 많다. 반대로 변화의 징후를 민감하게 읽은 기업은 신제품으로 새로운 시장을 선도했다. 결국 ‘누가 세상을 바꾸는가’가 아니라 ‘누가 세상에 맞춰 바뀌는가’의 문제다.
새 정부가 내세운 '수요자 중심 행정'은 바로 이 현실을 겨냥한다. 국민소비쿠폰 정책은 단순한 지원이 아니다. 소비가 살아야 내수가 움직이고, 소상공인이 회생하며, 경제가 선순환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정부가 국민 필요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행정은 제 역할을 한다. 이는 단지 재정정책의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행정 철학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공급자 중심 행정이 '효율'을 앞세웠다면, 수요자 중심 행정은 '공감'을 앞세운다. 효율만으로는 시대를 견디기 어렵고, 공감 없는 행정으로는 국민 신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실용주의 시각을 더하면 메시지는 한층 구체화된다. 수요자 중심 경영은 단지 '옳다'는 도덕적 명제가 아니라,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실용적인 전략'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을 읽고, 그에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신속하게 제공하는 기업이야말로 비용을 줄이고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화려한 비전보다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목소리를 현실적 제약 안에서 어떻게 구현해내는가 하는 문제다. 결국 '수요자 중심'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매출과 이익, 나아가 기업 존속을 좌우하는 실질적 경영 원리다.
정치는 국민의 선택을 무시할 수 없다. 공급자 중심의 사고를 고집하는 정당은 선거에서 외면받는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우리가 옳다"는 논리를 내세워도 소비자가 외면하면 시장은 냉정하게 돌아선다. 소비자의 선택을 얻지 못한 기업은 생존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현재 기업이 직면한 과제는 더 무겁다. 행정이 상대해야 할 대상이 국민이라면, 기업은 훨씬 더 넓은 대상을 상대해야 한다. 소비자의 기호, 시장의 흐름, 세상의 변화를 동시에 살펴야 한다. 국내를 넘어 글로벌 고객도 봐야 한다. 결국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이 아닌 ‘나 자신’, 곧 기업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공급자 중심과 수요자 중심은 단순한 대립 구도가 아니다. 헤겔의 정·반·합처럼, 하나의 사고가 힘을 얻으면 이를 부정하는 반대가 등장하고, 결국 양자의 긴장을 거쳐 새로운 균형으로 나아간다. 공급자 중심이 효율을 강조하며 한 시대를 이끌었다면, 지금은 수요자 중심이 대세가 된 시대다. 최종 목적지는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두 관점이 조화롭게 진화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교훈은 분명하다. 변화를 외면하는 기업은 속도에서 뒤처지고 만다. 기술은 시시각각 발전하고, 소비자의 기대는 높아지며, 시장 구조는 예고 없이 뒤집힌다. 그럼에도 "소비자가 내 제품의 진가를 모른다"며 탓만 한다면 이미 반쯤은 도태된 것이나 다름없다.
투자자도 이 점을 놓쳐선 안 된다. 기업이 변화를 읽지 못하고 소비자에게 책임을 돌린다면, 투자 가치는 빠르게 떨어진다. 경영진이 공급자 중심의 사고에 안주한다면 그 조직은 성장 곡선을 잃을 수밖에 없다. 투자자는 단순히 숫자만이 아니라 기업이 변화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수요자 중심 경영이란 불만을 달래는 수준이 아니다. 변화의 책임을 세상 밖이 아닌 스스로에게 묻는 태도다. 세상은 원망한다고 바뀌지 않는다. 소비자도 강요한다고 내 편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 맞춰 끊임없이 나를 바꾸는 것, 그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다.
변화는 늘 불편하다. 하지만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 과거에 안주하는 순간, 기업은 미래를 잃는다. 투자자 역시 안주하는 기업에 자본을 묶어둘 이유가 없다. 국민의 선택을 무시한 정당이 퇴출되듯, 소비자의 선택을 외면하는 기업도 시장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정과 반의 충돌 끝에는 더 성숙한 행정과 경영이 등장한다. 바로 그 점이 우리가 여전히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이유다.
■ 김종선 대표는 경영학박사로, 현재 기업 경영 자문 및 밸류업 관련 전문컨설팅회사 '제이드케이파트너스'를 운영 중이다. 지난 30여년간 코스닥협회 등에서 상장회사관련 제도개선 및 상장회사 지원 업무를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초기기업부터 상장회사까지 성장 과정 전반에 관한 전문적 자문을 활발히 수행한다. 아울러 벤처 및 상장회사 관련 제도개선에도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등 기업 애로사항 해소를 위한 부분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