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은 경제라는 광산 속 ‘카나리아’와 같다. 광산 속 카나리아가 유독가스를 감지해 광부들에게 위기를 알리듯, 스타트업은 기술과 세계 정세의 변화에 가장 먼저 반응한다. 변화가 빠른 만큼 기회도 크지만, 그만큼 위기에도 취약하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여행·공연 관련 스타트업들은 하루아침에 매출이 바닥을 치며 인력 구조조정과 비용 절감에 매달려야 했다. 반면 플랫폼 기반 창업이나 바이오·제약 분야 스타트업들은 오히려 투자 호황을 맞았다.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찾아온 것이다.
■ 딥테크 창업 "얼어붙었다"
하지만 최근 딥테크(Deep Tech) 분야 창업자들 목소리는 무겁다. 모 회의에서 여러 창업자가 이구동성으로 “투자가 얼어붙었다”고 했다. 세계 정세가 불확실하고, 산업 전망이 하루가 다르게 흔들리니 투자자들이 지갑을 닫아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매출이 보장되는 기업만 투자 대상으로 삼고, 수년간 연구개발이 필요한 인공지능, 바이오헬스케어, 차세대 에너지 분야 스타트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기술 서비스 용역으로 연명하는 실정이다.
정부 지원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매출·고용·투자 등 단기 성과 중심의 정량 지표가 평가를 상당히 좌우하다 보니, 개발 주기가 길고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딥테크 창업의 특수성이 반영되지 않는다. 회의에 참가한 한 대표가 ‘크게 투자하고 길게 기다려 주는’ 외국 벤처투자사의 지원이 우리 생태계에서는 참 먼 나라 얘기라고 한탄했다.
그런데 분위기를 바꾸는 인상적인 사례가 있었다. 한 초기 AI 기업은 “자금 사정이 넉넉하지 않지만 가트너(뉴욕거래소에 상장된 IT 서비스·컨설팅 업체) 구독료 1억원을 내고 있다”며 자사 근황을 얘기했다. 가트너 서비스를 통해 최신 기술 정보를 얻고, 전문 애널리스트가 당사에 도움이 될 글로벌 CTO·CEO를 연결해줘 고민하던 문제를 해결하고, 해외 시장 진출 전략 자문까지 그 많은 구독료가 결코 아깝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 지원금 1억원보다 이런 글로벌 네트워크가 창업자에게 훨씬 값진 자산이 되는 세상이다. 아이비리그 대학으로 학생들이 거액의 등록금을 내고 가는 이유 역시, 연구 여건 못지않게 동문 네트워크와 기회의 장이라는 ‘무형 자산’에 그 무게 중심이 있을 것이다.
■ 창업자에게 지원금보다 값진 자산은...
우리나라 창업 생태계는 불과 30여 년 만에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1986년 중소기업창업지원법 제정 이후 벤처캐피탈과 창업투자회사가 본격적으로 설립됐고, 2000년대 벤처 붐을 거치며 정부의 마중물 지원에 힘입어 창업 기업은 급증했다. 2021년에는 무려 73만 개까지 늘었고, 서울은 2025년 글로벌 창업 생태계 평가에서 ‘창업하기 좋은 도시’ 8위에 올랐다.
다만 성장 속도는 둔화되고 있다. 창업 기업 수는 4년째 감소세로 돌아섰고, 올해는 57만 4401개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8% 줄었다. 글로벌 유니콘 기업 수(1200개 이상)도 미국과 중국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그 뒤를 큰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인도가 세계 3위의 스타트업(2025년 110개 넘는 유니콘 기업 보유) 생태계를 형성하며 무섭게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반면 한국은 30여 개에 불과하고, 증가세도 점점 약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창업 생태계의 풀뿌리, 초기창업자를 육성하는 액셀러레이터(AC)도 상황이 녹록지 않다. 2025년 현재 490개로 지난해보다 23개 늘었지만 증가 폭은 줄었고, 2024년에는 투자 실적이 전혀 없는 AC가 20%에 달했다. 결국 창업 초기 지원을 담당하는 중요한 주체가 충분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창업생태계 '적신호'...K-팝의 성공 공식
이쯤에서 우리는 K-팝의 성공을 떠올려볼 만하다. 싸이, BTS, 블랙핑크 같은 스타들이 세계를 누비기까지는 SM, JYP 같은 대형 기획사의 뒷받침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가수를 데뷔시키는 것이 아니라 캐스팅, 트레이닝, 프로듀싱 전 과정을 체계화했다. 효율적인 인재 육성과 콘텐츠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유튜브와 SNS를 적극 활용해 글로벌 시장에 진출했다. 충성도 높은 팬덤이 형성된 것도 이러한 시스템 덕분이었다. K-팝이 세계적 산업으로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창업 생태계도 이 같은 시스템이 필요하다. 최근 주목받는 ‘벤처스튜디오’ 모델은 단순히 자금을 투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이디어 구상, 팀 빌딩, 초기 자금, 시장 진출까지 전 과정을 직접 주도한다. 스타트업과 공동 창업자가 돼 실패 위험을 줄이고 성공 확률을 높인다.
해외에서는 이미 성공 사례가 많다. 미국 LA에서 1996년 시작한 아이디어랩(IdeaLab)은-비록 당시에는 ‘벤처스튜디오라는 용어가 나오기 전이었으나 진정한 모델 사례라 할 만 하다-끊임없는 내부 아이디어 개발과 육성을 통해 150개 이상의 벤처를 설립했고, 45건이 넘는 엑시트를 기록했다. 와이콤비네이터(Y Combinator)는 오픈AI, 에어비앤비, 드롭박스 등 수많은 혁신 기업을 배출했고, 구글벤처스(GV)는 우버, 슬랙을 키웠다. 현재 전 세계에는 1100개가 넘는 벤처스튜디오가 활동하며 새로운 스타트업을 쏟아내고 있다.
■ 공공 부문도 좀 더 체계적이고 글로벌하게!
물론 “그 어려운 창업을 공장에서처럼 찍어낼 수 있겠나”하는 회의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디어를 저위험 환경에서 빠르게 검증하고, 법인 등록, 회계 처리, 기술이전 계약 같은 절차를 AI 기반 시스템으로 지원하며, 각 단계에서 전문 인력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연결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실패를 통한 교훈도 소중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패 확률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문제는 공공 부문이다. 마음만 앞서지 변화는 느리고, 어제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민관이 협력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마침 지난해 개정된 벤처기업육성법과 벤처투자촉진법은 벤처스튜디오 설립 근거를 강화했다. 이를 또 다른 변화의 계기로 삼아보자.
이제는 창업 생태계도 좀 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며 글로벌 확장이 용이한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정부도 우리 창업자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와 자원을 연결하는 데 힘쓰고, 기업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창업자들이 발 빠른 대응을 하되, 더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일에 매진토록 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았으니 이겼다는 자기 위안에 그치지 않고, K-팝처럼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키는 K-유니콘으로 성장할 수 있다.
■ 법학박사로 국회, 청와대, 공공기관을 두루 거치며 교육, 과학기술, 창업 정책을 다뤘다. 교육정책에 매진했을 당시에는 하나의 정책에 얼마나 많은 이해와 갈등이 얽히고설킬 수 있는지 깊이 체득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재직 시절엔 ‘창의교육’과 ‘교육기부’에, 창업진흥원에서는 ‘창업’과 ‘혁신’에 꽂혀 정부정책과 현장 사이에서 동분서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