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현대캐피탈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 발생했다. 현대차그룹이 계열사 이사회의 결정을 단박에 뒤집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현대캐피탈 임원추천위원회는 차기 대표이사 후보에 목진원 현임 대표를 단독 추천했지만 나흘 만에 다른 인물로 교체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사외이사 3명으로 구성된 임원추천위원회는 졸지에 머쓱해졌다. 가뜩이나 ‘거수기’ 비판을 받아온 상황에서 사외이사들이 스스로 ‘거수기’임을 인정한 꼴이 됐다.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사외이사제도를 깡그리 무시한 처사라고 봐도 무방할 만한 수준의 무리수라는 평가가 안팎에서 나왔다.
교체 발표도 현대캐피탈이 아닌 현대차그룹이 직접 했다.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바뀐 인물의 경력이 예사롭지 않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인 골드만삭스의 서울지점 대표 출신이다. 현대캐피탈보다는 오히려 현대차증권에 더 어울리는 경력의 소유자여서다.
■ 머쓱해진 현대캐피탈 사외이사들
이번 주부터 업무를 시작한 현대캐피탈 정형진 신임 대표이사는 미국 하버드대 학사, 브라운대 석·박사 학위를 가진 유학파다. 1999년 골드만삭스 서울지점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 25년 동안 한 회사에서만 경력을 쌓았다. 2014년부터 서울지점 한국 대표를 맡았고, 국내 주요 기업들 투자를 자문하며 굵직한 거래들을 성사시킨 인수합병(M&A) 전문가다.
현대차그룹과도 인연이 깊다. 20년 전 GE캐피탈과 전략적 제휴를 맺을 때 이를 자문한 곳이 골드만삭스였다. 2011년에는 패색이 짙었던 현대건설 인수전을 드라마틱하게 역전시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현정은 회장이 이끌던 현대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됐으나 그가 인수자금 조달 문제를 제기해 결과를 뒤집었다. 2014년에는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이 보유한 이노션 지분 매각을 성사시키며 인연을 이어간다.
이런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2018년에는 그룹 최우선 과제인 정몽구-정의선 경영 승계를 위한 지배구조 개편에도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 아이디어는 시장에서 ‘절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최종 성사되지는 못했다. 엘리엇 등 외국계 주주들의 반발로 주주총회가 취소되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며 실패로 끝났다. 당시 자문단을 이끌었던 정형진 대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후일을 기약했다.
이후 6년 동안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그룹이 정형진 대표를 무리수를 둬가며 현대캐피탈 대표이사로 전격 영입한 것. 시장에서 ‘멈췄던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다시 가동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올 만한 상황이다. 정몽구 명예회장의 건강상태 등을 고려했을 때 시간은 결코 그룹 편이 아니다. 늦어도 한참 늦은 측면이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은 공정거래법에 따른 공시 의무,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한 이익제공금지 등의 규제뿐만 아니라 상호출자 금지, 순환출자 금지, 채무보증 금지, 금융·보험사 의결권 제한 등 각종 규제를 적용받는다. 순환출자 구조(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를 해소하지 못한 현대차그룹은 10년 넘게 공정위로부터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다.
■골드만삭스와 인연 깊은 현대차그룹
임 대표이사의 미션이 현대캐피탈 경영을 잘 하는 것인지, 더불어 경영권 승계 작업에도 관여하는 것인지, 더 나아가 그룹의 금융 계열사 재편까지 떠맡는 것인지 현재로선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정형진 대표의 행선지가 현대차증권이 아닌, 현대캐피탈이란 점에서 안팎에선 그의 미션이 간단치만은 않을 것이란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2021년 금융복합기업집단법 시행에 따라 삼성, 한화, 미래에셋, 교보 등 국내 7개 금융그룹은 대표금융회사를 지정해야 한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대표금융회사는 현대캐피탈이다. 카드, 캐피탈, 증권 정도만 보유한 것으로 알기 쉽지만 현대차그룹의 금융계열사는 해외 법인까지 포함할 경우 40곳이 넘는다. 현대캐피탈 미국 법인의 자산만 70조원에 육박한다.
현대차그룹은 2021년 8월 현대캐피탈을 대표금융회사로 지정해 금융감독원에 보고했고, 곧바로 그룹 직할 체제에 편입시켰다. 이는 현대캐피탈이 현대차그룹 금융회사들의 맏형임을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표금융회사의 의무인 지배구조 공시도 당연히 현대캐피탈이 맡고 있다. 여러 정황상 그룹의 금융 부문 책임을 정형진 대표에게 맡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룹 내 직급은 카드와 커머셜을 맡고 있는 정태영 부회장이 높지만 역할로만 보면 정태영 부회장이 정형진 대표의 지시를 따라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외국계 투자은행의 경우 국내 금융시장에서 콧대 높기로 유명한데 골드만삭스의 경우 그 중에서도 톱 레벨”이라며 “정형진 대표가 현대캐피탈로 간다는 발표가 났을 때 다들 놀랍고 의외라는 반응이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룹 지배구조 개편 참여 등 정몽구-정의선 오너와의 오랜 신뢰 관계가 없었다면 이뤄지기 어려운 영입이었다는 전언이다.
■정형진 대표에게 주어진 미션
현대차그룹은 세간의 이 같은 확대 해석에 선을 긋는 모습이다. 그룹은 정 대표 영입에 대해 “글로벌 투자·금융 분야에서의 탁월한 전문성을 기반으로 현대캐피탈의 글로벌 진출을 가속화하고 금융 전문성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등 완성차 판매 및 금융 간 시너지 제고에 박차를 가하며 회사를 이끌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속 금융사로서의 역할 강화에 전념할 것이란 뉘앙스다.
하지만 그룹이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해 있고, 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방향에 따라 금융 계열사들의 운명도 갈린다는 점에서 정형진 대표의 위상과 역할이 현대캐피탈에 국한될 것이라 보는 이는 많지 않다. 2018년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배구조 개편에 모종의 역할을 할 것이란 분석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증권가 한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의 2018년 지배구조 개편 시도시 주목할 만한 점은 지주회사 체제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며 “시장이 예측했던 지주체제의 경우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금융 계열사들을 분리시켜야 하는데 자동차 판매에서 전속 금융사의 역할이 중요한 현대차 입장에서는 고민이 컸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카드-캐피탈-커머셜’ 금융 3사가 계열 분리될 것이란 시장의 예측이 엇나간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금융복합기업집단법 시행에 맞춰 그룹은 현대캐피탈 직할 경영을 결정했고, 이제 무조건 금융회사를 안고 가면서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오너 일가 외에 가장 깊이 고민한 이가 정형진 대표다. 오너의 지배력 강화 측면에서 현재로선 지주회사가 가장 현실적 대안이다. 다만, 지주회사가 최종 목적지라 하더라도 경유지는 여러 곳일 수 있다. 금융 부문의 경우 현대캐피탈을 중심으로 보험, 자산운용 등 완전히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더구나 정형진 대표의 최대 강점은 ‘M&A’다.
이에 대해 현대캐피탈 관계자는 “정형진 대표 선임과 관련해 지배구조 개편과 연결 짓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라며 “지난해 현대캐피탈의 글로벌 자산이 158조원을 넘었는데 앞으로도 해외 생산 거점을 중심으로 계속 투자가 이어져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글로벌 감각을 갖춘 금융 전문가를 영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6월부터 업무를 시작한 정형진 현대캐피탈 신임 대표. 1999년 골드만삭스 서울지점에 발령받은 이후 올해 초까지 25년 동안 한 회사에서만 경력을 쌓은 M&A 전문가다. 골드만삭스는 2018년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추진 당시 NH투자증권, 김앤장법률사무소, 삼일회계법인 등과 함께 공동 자문을 맡았는데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자료=현대캐피탈)
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대한민국 대표 재벌 중 하나인 현대차그룹의 금융을 들여다 봤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