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수출선적부두 옆 야적장에 완성차가 대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관세 폭탄에 대응하기 위해 ‘현지 생산’이라는 고육지책이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 긴급 처방은 국내 생산기지 축소와 부품업계 붕괴, 지역경제 몰락이라는 치명적 부작용을 남길 수 있어 우려가 크다. 완성차에서 화장품까지 줄줄이 미국행을 택하는 순간, 지방 산업 생태계는 뿌리째 흔들리며 지방 소멸의 시계가 더욱 빨라진다.

■ 울산의 ‘멈춘 라인’…관세가 눌렀다

현대자동차 울산 1공장 2라인이 14일부터 20일까지 가동을 멈춘다. 올해만 벌써 여섯 번째 휴업이다. 아이오닉5와 코나EV를 생산하는 이 라인은 미국 전기차 수출 물량이 급감하면서 멈춰섰다.

미국의 15% 관세 부과 이후, 현대차는 주요 판매 차종을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조지아 신공장에서 올 1~7월 생산한 아이오닉5는 3만1598대로 전량 미국 시장에 공급됐다. 같은 기간 국내 생산·수출량은 1만6716대에 불과했다.

■ 관세 회피가 낳은 ‘탈(脫)한국’

자동차뿐만 아니다. 가전·반도체·배터리·조선·화장품까지 대미 수출 기업들이 줄줄이 현지 생산에 나섰다. LG전자·삼성전자는 멕시코·미국 공장을 확충했고, 화장품 ODM(제조자 개발 생산)기업들은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메이드 인 USA’로 이동 중이다. 관세 장벽을 피하려면 현지 생산 외에 선택지가 없다. 하지만 그 대가로 국내 생산라인 가동률 하락, 부품 협력사 매출 감소, 지역 일자리 축소가 현실화되고 있다. 경북·대구 지역은 전국 자동차 부품업체의 20%가 밀집해 있고, 매출은 25조원 규모로 전국의 18%를 차지한다. 생산 감소와 투자·고용 위축은 곧 지방자치단체 재정 악화와 지역 공동화로 이어질 수 있다.

■ 해외 생산의 그림자…산업 공동화 우려

현지 생산은 품질·공급망·기술 유출 위험을 안고 있다. 본사의 품질관리 시스템은 해외 공장에도 적용되지만 인력 숙련도와 부품 조달 안정성 문제는 상존한다. 더 큰 문제는 ‘산업 공동화’다. 완성차 업체뿐 아니라 5000여 개 협력사가 얽힌 자동차 생태계, 조선·철강 기자재 공급망이 함께 흔들릴 수 있다.

정부는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가 국내 제조업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을 인정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AI·친환경 선박·첨단 부품 등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업그레이드할 기회로 본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산업 공동화라는 소극적 시각보다 부가가치를 높여 세계 시장을 잡는 적극적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재정·세제 지원과 해외 기업 유치를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 ‘균형형’ 글로벌 전략 필요

전문가들은 관세 회피를 위한 단기적 현지 이전이 아니라, 국내·해외 생산거점의 균형 유지가 장기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해외 생산을 확대하더라도 핵심 기술과 고부가 부품 제조는 반드시 국내에 남겨 산업 생태계의 뿌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미 투자와 현지 생산은 단기적으로는 관세 장벽을 돌파하는 해법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내 산업 기반을 잠식하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정부·기업·국회가 합심해 ‘균형형 글로벌 전략’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대미 투자 뒤에 남는 것은 빛바랜 생산기지와 줄어든 일자리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