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아파트 공사현장 모습 (사진=손기호 기자)
정부가 2035년까지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대폭 강화하면서 건설·건자재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기존보다 높은 감축률이 확정되면서 앞으로는 공공 및 민간 발주에서 탄소저감 기술을 얼마나 갖췄는지가 사실상 수주 자격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건설 대형사는 저탄소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시멘트 등 기반 자재업계는 "투자 여력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는 분위기다.
■ 온실가스 53~61% 감축, 건설·건자재 직격탄
대통령 직속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와 국무회의는 이달 중순에, 오는 203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2018년 대비 53~61% 줄이는 새로운 NDC를 확정했다. NDC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로, 기존 정부 초안이었던 50~60%보다 하한과 상한을 모두 끌어올린 것이다. 지난 2018년 7억4230만톤(t)에서 2035년 2억8950만~3억4890만t 수준으로 감축하겠다는 계획이다.
부문별로 보면, 전력 발전 부문이 68.8~75.3%로 가장 큰 폭의 감축이 요구될 전망이다. 건물 부문도 53.6~56.2% 감축, 수송 60.2~62.8% 감축이 목표다. 산업 부문은 24.3~31% 감축으로 상대적으로 낮지만 이미 배출량 규모가 커서 절대량 기준 부담은 적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건설업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영역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현장 장비와 운송에서 발생하는 직접 배출이고, 다른 하나는 콘크리트·철강·유리·단열재 등 건자재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간접 배출이다.
특히 건물 부문의 감축 목표가 50%를 상회하면서 향후 신규 건축물은 제로에너지건축, 고효율 외피와 설비, 저탄소 자재 사용이 사실상 필수 요건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난감해" 시멘트 중심 건설자재 업계, 탈탄소 전환 최대 난관 직면
NDC 상향의 직접 충격은 특히 건설업계의 필수 기초 자재인 시멘트와 콘크리트 등에 집중되는 모습이다. 시멘트는 건설 공정 중 탄소 배출 비중이 가장 높으나 감축을 위한 기술과 재정 여건이 충분치 않아 업계 부담이 확산되고 있다.
한국시멘트협회의 지난해 연간 통계에 따르면, 국내 시멘트 생산량의 72%가 레미콘과 콘크리트 제조 용도로 투입된다. 이런 구조와 시장 환경 탓에 탈탄소 설비 투자 속도가 건설비, 분양가 등에 직접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올해 시멘트 수요는 약 3650만t. 지난 1991년 3711만t 이후 34년만의 최저 수준을 기록할 전망이다. 경기 침체에 출하량 감소까지 겹쳤다. 추가 설비 투자가 요구되면서 업계의 부담이 복합적으로 커질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시멘트업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설비 현대화와 환경 규제 대응에만 2조5000억원 이상을 투입했지만 탄소감축 설비 전환에는 자금력이 충분치 않다는 입장이다. 석회석의 고온 소성 과정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도 대체 연료만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공정 한계가 있다는 것.
감축역량이 부족한 기업은 비용 상승과 생산 축소와 구조조정의 연속된 부담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시멘트업계 관계자는 "탄소 감축 기술이 부족할 경우 설비 운영이 오히려 적자 운영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국시멘트협회에 따르면, 실제 환경 및 안전 규제 대응에 드는 연간 비용만 약 4300억원에 달하고 시멘트 원가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열원 전환, 대체재 비율 확대, 탄소포집저장 기술 상용화 등이 본격화되면 비용 압박은 더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 대형 건설사, 기술 선점 서둘러…NDC 시대 수주 무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형 건설사들은 NDC 강화 이전부터 저탄소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앞으로는 얼마나 탄소배출량을 많이 하느냐가 수주 경쟁력이 될 것이란 판단에서다.
최근 건설업계에 따르면 HDC현대산업개발과 현대엔지니어링은 '일사조절 필름 일체형 성능가변 창호 기술'에 대해 녹색기술인증을 획득했다. 이는 커튼월 창호 프레임 내부에 말림식 필름 구동장치를 내장해 외기 온도와 냉난방 가동 여부 등에 따라 유입되는 일사를 자동 조절하는 기술이다. 시험 결과 창호 1㎡당 연간 약 72.5kWh의 에너지 절감과 34.4㎏의 이산화탄소 저감 효과가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건설이 지난 23일 국내 건설사 최초로 기후에너지환경부로부터 '탄소저감 조강형 콘크리트(DECOCON)'에 대한 환경성적표지(EPD, Environmental Product Declaration) 인증을 획득했다. (사진=대우건설)
두 회사는 이건창호·대진 등과 공동 연구를 통해 해당 기술을 개발했다. 향후 대형 오피스 건물과 주거 복합단지에 적용 범위를 넓혀 제로에너지 건축물 수주전에서 강점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제로에너지 인증과 녹색건축인증, ESG 평가에서 창호와 외피 성능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실질적인 수주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우건설도 저탄소 조강형 콘크리트를 선보인 바 있다. 이 회사는 '탄소저감 조강형 콘크리트'를 개발했는데, 이는 주 배출 원인인 시멘트 사용량을 줄이고 고로슬래그 미분말 등 산업 부산물을 활용해 기존 콘크리트 대비 이산화탄소 배출을 최대 54%까지 줄인 것이 특징이다.
대우건설은 이 콘크리트를 국내 주요 현장 8곳에 적용 완료하거나 적용 중이다. 최근에는 환경성적표지(EPD) 인증 심의도 통과했다. 연말까지 저탄소 제품 인증, 내년 초에는 탄소감축 인증까지 확보해 향후 탄소배출권 사업으로까지 확장한다는 방침이다.
대형 건설사들은 "친환경 기술들이 실제 수주 평가표에 반영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실제로 해외 대형 개발사업이나 연기금과 국부펀드가 참여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F)에서는 환경성적표지, 탄소발자국 산정, 저탄소 자재 사용 여부가 이미 심사 항목으로 포함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공공 발주에 '저탄소 자재 사용 의무'이나 '온실가스 감축계획 제출' 등이 단계적으로 도입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 "수주 시장 '탄소 감축 역량'이 사업 자격 될 것"
문제는 기술 격차가 사실상 수주 격차로 직결되고 있어서 기술이 없는 기업일수록 배출권을 돈 주고 사거나 벌금을 내는 쪽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데 있다.
하지만 기술 개발 여력이 부족한 중견, 중소 건설사와 일부 건자재 업체들은 이중 압박이다. 경기 침체로 수주 자체가 줄어든 상황에서 제한된 수주 물량마저 저탄소 기술을 갖춘 대형사 위주로 쏠릴 수 있어서다.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입지와 브랜드, 분양가에 더해 탄소저감을 얼마나 제시할 수 있는지가 향후 재건축 및 재개발, 공공 복합 개발, 해외 인프라 수주전의 핵심 사안이 될 것"이라며 "저탄소 자재와 장비, 설계 기술 등을 선제적으로 확보한 회사와 그렇지 못한 회사가 몇년 사이에 극명하게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