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조두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소원')
국민 법 감정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가수의 죽음에 ‘의혹’이란 단어가 붙자 대중은 그의 노래를 사랑한 만큼 끓어올랐다. 내 자식, 내 가족의 일이 될 지도 모르는 잔혹한 10대 범죄는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결과물로 일상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 치기어린 마음에, 삐뚤어진 질풍노도의 시기라 그랬다고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제발 딸을 살려 달라고 호소하던 희귀병의 남자는 딸의 친구를 죽인 흉악범으로 드러났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여론은 더욱 강력한 법의 울타리를 원하고 있다. 국민의 안전을 지켜달라 호소하는 이른바 ‘국민 법 감정’에 따른 법안들이 여론을 등에 업고 연달아 등장하고 있다. 개인, 소수가 아닌 ‘국민’이란 이름으로 들썩이게 만든 일련의 사건과 의혹. 여론의 힘으로 이뤄낸 각종 사건 관련법과 더불어 ‘김광석법’ 발의, ‘소년법’ 개정 혹은 폐지 요구, 사형제 부활 등은 현실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편집자주
[뷰어스=문서영 기자] 아름다운 노래로 기억될 가수는 어느 순간 억울한 죽음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그’가 살해당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도 있다. 어설픈 음모론이라 치부하는 이들 중에도 자살이 아닌 ‘사고사’란 주장이 나온다. 모든 것은 영화 ‘김광석’을 세상에 내놓은 이상호 기자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자신이 '기자 초년생 시절부터 꾸준히 김광석이란 인물과 주변을 추적해왔다'며 자신의 취재를 바탕으로 의혹을 제기한다. 영화 ‘김광석’의 영제는 ‘Suicide Made(조작된 자살)’로 감독의 확신을 드러내고 있기까지 하다. 이로 인해 서해순 씨는 곤욕을 치르고 있으며 딸의 죽음에 의혹이 잇따르면서 경찰조사를 받기도 했다. 결과론적으로 영화 ‘김광석’이 김광석 본인의 죽음에 대한 단죄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공소시효 때문이다. 다만 이번 이슈로 인해 사고사, 혹은 그 이상일 수 있는 죽음의 진실을 밝힐 수는 있을 것으로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있기에 ‘김광석법’에 쏠린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고 있다.
(사진=CJ E&M)
■ '현재 진행형' 여론이 이끌어낸 그 법안들
‘김광석법’은 입법을 위한 국민 청원서명운동과 더불어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추혜선 정의당 의원 등을 중심으로 발의를 검토 중이다. 살인죄에 공소시효를 없애자는 주장이다. ‘김광석법’ 발의에 의미가 있다고 보는 의원들은 지난 9월 6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실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면서 살해 의혹이 제기된 변사 사건의 경우 공소시효와 관계없이 재수사할 수 있도록 현행 형사소송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 개정안은 2000년 8월 이전 변사 사건 중 살해 의혹을 풀 새로운 단서가 나오고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으면 수사와 공소가 가능토록 한 내용이 핵심이다.
특히 추 의원은 가수 전인권, 영화 '김광석'을 연출한 이상호 기자와 함께 정론관 기자회견장에 섰고 “진실을 밝혀주는 건 국민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이 높은 관심을 보이는 만큼 여론을 등에 업고 이 법의 국회 처리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사진=SBS 방송화면)
소년법 일부 개정법률안은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 접수된 건수만 9건에 달한다. 9월 1일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 피해자의 피투성이 사진이 전국을 뒤흔든 후 9월 6일부터 26일까지 꾸준히 소년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접수됐다.
이른바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으로 끓어올랐던 여론은 부산, 강릉, 아산으로 이어진 여중생 폭행사건에 기함했고 소년법 폐지를 주장했다. 청원서명운동이 벌어졌고, 청와대는 들끓는 여론에 대한 피드백으로 조국 민정수석과 김수현 사회수석이 나서 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다. 조 수석은 “이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단순하게 한 방(소년법 개정)에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오”라며 김 수석과 함께 다양한 제도들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폐지가 아닌 개정으로 다시 뜻이 모였다. 청와대 측의 입장 발표 후 청원게시판에는 소년법 처벌과 연령대에 대한 개정을 요구하는 청원이 새로 시작됐다. 국회의원들도 너도나도 ‘소년법 개정’법안을 제출했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접수돼 계류 중인 ‘소년법 일부 개정’ 법안은 9개. 크게 다를 바 없다. 대부분 촉법 소년 기준 연령을 14세에서 12세로 낮추자는 것, 그리고 형량을 20년에서 25년으로 늘이자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진=EBS 방송화면)
■ ‘국민 법 감정’이 일군 성공, 그리고 실패
앞서 2015년에는 여론이 힘을 보탠 ‘태완이법’이 국회의 산을 넘어섰다. 김태완 군은 1999년 대구에서 황산 테러를 당해 사망했다. 잔혹하기 그지없는 ‘묻지마 범죄’로 인해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난 김태완 군 사건은 공소시효 만료에 임박해 여론이 들끓으며 만들어졌다.
앞서 2007년 12월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살인죄 공소시효는 종전 최장 15년에서 25년으로 늘었다. 이 개정법은 법 시행 이전 사건에는 소급적용하지 않도록 조건이 붙어 법 개정 이후 발생한 사건에 한해 시효가 연장됐다. 김태완 군 사건은 이를 적용받은 케이스지만 2014년 공소시효가 끝났다. 이 때문에 서영교 민주당 의원을 필두로 살인죄 공소시효를 없애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됐고 ‘태완이법’이라 명명했다. 2015년 7월 31일 시행된 ‘태완이법’은 실제로는 2000년 8월1일 이후 발생한 살인사건만 공소시효를 없앨 뿐이라 정작 김태완군 사건의 범인에게는 ‘태완이법’이 적용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반쪽의 성공’이란 시선도 있었지만 시행 후 2년간(2017년 7월까지) 4건의 장기미제사건이 해결되며 그 의미를 더했다. 2001년 6월 경기 용인 ‘교수 부인 살인사건’, 2001년 2월 전남 나주 ‘드들강 여고생 성폭행 살인사건’, 2002년 4월 충남 아산 ‘갱티고개 노래방 주인 살인사건’, 2002년 12월 서울 구로구 ‘호프집 주인 살인사건’이 ‘태완이법’으로 인해 범인을 밝혀내며 피해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조두순법’으로 불리는 성폭력특별법도 조두순의 인면수심 범죄로 인해 발의됐다.
2008년 성범죄 전과 14범 조두순이 등교 중이던 초등학생 나영이(가명)를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천인공노할 짓이었지만 법원은 당시 가해자가 만취 상태였다는 이유로 무기징역 대신 징역 12년형을 선고했다. 국민 법 감정과 온도차가 큰 판결에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민심을 읽은 국회가 ‘만취 상태에서 성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감경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조두순법’을 발의했다. 이 법은 국회에서 통과될 때까지 뜨거운 여론의 관심을 받으며 결국 입법에 성공했다.
‘조두순법’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초기에는 피해자 가명을 딴 ‘나영이법’으로 불렸기 때문. 가명일지라도 이 법이 언론에서 언급될 때마다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이 가중됐다. 결국 법안 발의 이후 가해자의 이름을 넣은 ‘조두순법’으로 별칭이 바뀌었다.
(사진=MBC 'PD수첩' 방송화면)
국민 법 감정이 실패한 대표적 사례로는 꾸준히 급증하고 있는 데이트폭력법을 들 수 있다. 지난 1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10년 간 연도별 유형별 데이트 폭력 피의자 검거인원’ 현황 자료를 공개했다.
10년간 데이트 폭력 사범은 ▲2007년 8925명 ▲2008년 8952명 ▲2009년 8965명 ▲2010년 7755명 ▲2011년 7292명 ▲2012년 7584명 ▲2013년 7237명 ▲2014년 6675명 ▲2015년 7692명 ▲2016년 8367명 등으로 집계됐다. 올해 상반기만 해도 형사 입건된 데이트 폭력 사범은 무려 4565명에 달한다.
연평균으로 따지면 최근 10년 간 매월 9명 가량이 데이트 폭력으로 인해 살해당하거나 살해 위험에 노출된 셈이다. 지난해 2월, 데이트 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한 박남춘 더불어민주당 의원(인천 남동구갑)은 경찰이 가해자를 격리시킬 수 있는 등 조치를 담은 ‘데이트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심의조차 되지 못한 채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박남춘 의원은 지난 3일 다시 자료를 배포하며 데이트폭력금지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19대 국회 때 발의한 데이트폭력 방지법(데이트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안)을 보완해 정기국회 때 재발의할 예정이라 밝혀왔다.
이 밖에 고 최진실 사망 후 친권이 아버지에게 넘어가자 남매를 키워온 외할머니도 친권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발의된 ‘최진실법’(부모 중 한 사람이 사망하면 남은 부모에게 자동으로 친권이 생기는 친권 자동 부활제 폐지)은 2015년 7월부터 시행 중이다. 고 신해철 사망 후 의료 사고 피해 구제와 관련해 관련법의 허술함이 드러나자 정치권이 이를 보완한 개정안을 내놓은 이른바 ‘신해철법’도 여론에 힘입어 19대 국회 때 통과된 법안으로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