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한 가전업체가 광고에 사용했던 이 슬로건은 우리나라 광고사에 남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누구나 경험과 직관을 통해 이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 이전에 경영자와 임직원은 수 많은 고민과 검토, 논의를 거듭한다. 그렇게 결행한 신사업 투자, 인수합병(M&A) 등 경영 판단은 10년 후 기업을 바꿔놓는다. Viewers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기업들이 지난 10년 전 내렸던 판단이 현재 어떤 성과로 이어졌는지 추적하고 아울러 앞으로 10년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공장 전경. (사진=현대차그룹)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 기조 아래 촉발된 관세 정책은 국내 산업에도 거대한 충격파를 던졌다. 특히 미국에 차량을 수출하는 비중이 높은 현대차그룹은 관세 부과 시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 와중 미국에 31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밝힌 현대차그룹의 선택에 이목이 쏠린다. 왜 고난이 예상되는 시장에 이토록 큰 투자를 결정했을까?

현대차그룹에 있어 미국은 가장 높은 중요도를 지닌 시장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1986년 포니 엑셀을 들고 처음 진출한 이래 2005년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2009년 기아 조지아 공장을 본격 가동하며 현지 생산을 늘려왔다. 그 결과 2011년 현대차·기아는 연간 판매량 100만대, 누적 판매대수 1000만대를 돌파했다.

이에 더해 약 10년 전부터는 정의선 회장의 주도 아래 제네시스 브랜드를 론칭, 본격적인 이미지 개선을 진행해왔다. 제네시스의 유려한 디자인과 함께 미국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SUV 라인업을 대폭 늘리면서, 품질·기술력·디자인이라는 세 박자를 모두 갖춘 것이다.

이제 현대차그룹은 미국 진출 39년 만에 누적 판매량 3000만대 돌파를 목전에 뒀다. 그럼에도 이 같은 성과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실정이다. 트럼프 발 관세 압박이 눈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관세를 90일 뒤로 유예했음에도, 취소가 아닌 유예인만큼 대외적 불안 요소는 여전하다.

이에 31조원의 '통큰' 투자는 이 같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신의 한수'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해당 투자의 세부 내용은 ▲조지아주 메타플랜트 아메리카 공장의 생산능력 증대 ▲루이지애나주 전기로 제철소 건설 ▲로보틱스·인공지능 분야에서 미국 기업 협력 확대 등이다.

이 선택으로 현대차그룹이 명분과 실리를 챙겼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대규모 투자가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를 대폭 늘릴 것으로 기대되면서, 트럼프 행정부로부터의 호의, 미국 소비자 이미지 제고, 현지 경쟁력 확보라는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는 평가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의 '6월까지 가격 동결' 선언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결국 현대차그룹은 개별 소비자에게 차를 공급하는 B2C(기업 대 소비자) 시장을 영위하고 있는 만큼, 대외적 위기에도 기업 이미지 확보에 총력을 다한다는 방침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인도 첸나이에 있는 현대차 공장에서 인도법인 임직원들과 내부를 둘러보고 있는 모습. (사진=현대차 그룹)

위기는 피할 수 없어…글로벌 시장으로 돌파구 모색

다만 일각에서는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세가 부과되면 가격인상은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JP모건은 완성차 업체들이 관세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경우 자동차 평균 가격이 11%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SK증권 또한 현대차·기아가 미국에서 지난해 수준의 판매량을 유지할 경우 각각 연간 약 5조2000억원, 2조9000억원의 영업이익이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현대차그룹은 해외 시장을 향해 글로벌 생산·공급망을 다변화하는 전략을 추진 중이다. 대표적인 진출 사례가 세계 3위 규모의 자동차 시장을 보유한 인도다. 현대차는 지난 3월 인도 자동차 시장에서 5만1820대를 팔며 2위에 올랐고, 기아 역시 2만5525대를 판매하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현대차그룹은 정의선 회장 주도 아래 현대차 인도 법인의 인도증권거래소 상장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전기차 생산 확대, 현지연구소 협업, 부품 공급망 내재화 등의 전략을 통해 현지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목표다.

하이브리드 차량을 중심으로 중국 시장 재진출도 노린다. 준중형 하이브리드 위주로 접근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고수익 차종인 대형 SUV 팰리세이드 하이브리드를 내세울 것으로 예상된다. 전기 충전이 필요없는 순수하이브리드(HEV) 방식을 차별점으로 중국 내 비(非)전기차 수요층을 공략한다는 구상이다.

신형 수소 승용차 '디 올 뉴 넥쏘'. (사진=현대차그룹)

■ 고성능 배터리·수소차 연구·개발…기본기 확보 '총력'

미래를 대비한 연구·개발, 협력도 이어지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최근 전기차 배터리의 기술 향상을 위한 전담 조직을 출범했다. BYD 등 해외 제조사가 5분만에 400km를 달리는 배터리를 선보이며 시장에 충격을 주고 있는 가운데, 외부 배터리 의존도를 줄이고 자체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지난달 삼성SDI와 로봇·휴머노이드용 고성능 배터리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은 것도 이 같은 전략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또 지난 2월에는 조직개편을 단행, 미래전략본부를 신설했다. 해당 부서는 계열사 미래 사업을 총괄하는 콘트럴타워로, 인공지능(AI), 전기차 인프라, 로봇, 자율주행, 미래항공모빌리티(AAM) 등 다양한 혁신 사업을 통합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수소차를 비롯한 미래 친황경차 시장에도 역량을 집중한다. 지난 3일 '2025 서울모빌리티쇼'에서 선보인 수소 승용차 넥쏘가 대표적인 사례로, 부족한 수소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미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는 모습이다.

정의선 회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현재의 위기를 '퍼펙트 스톰'으로 간주, 면밀한 준비를 통해 위기를 이겨내자고 강조한 바 있다. 그간 노력을 바탕으로 쌓은 '기본기'가 미래를 헤쳐나갈 경쟁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정 회장은 "우리는 항상 위기를 겪어왔고, 훌륭하게 그 위기들을 극복하고 더 강해졌다"며 "이런 위기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며, 자신감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헤쳐나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