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크루슈코 원전 전경. (사진=대우건설)

체코 두코바니 원전 수주전이 돌발 변수에 휘말리며 팀코리아의 유럽 원전 수출 전략에 중대한 차질이 생겼다. 프랑스 EDF의 소송과 EU 고위 당국자의 서한,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지속적인 지식재산권 압박은 단순한 계약 지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번 사태는 유럽이라는 정글에서 한국형 원전이 얼마나 복잡한 정치·외교·규제의 다층 구조와 맞서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 EDF, 체코서 유럽 전선으로 확전

체코 정부가 한수원과의 계약 체결을 보류하게 만든 EDF의 법적 공세는 이미 단일 사업의 영역을 벗어났다. 프랑스는 체코에서 입찰 경쟁에서 탈락하자 곧바로 EU의 ‘역외 보조금 규제(FSR)’를 앞세워 팀코리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프랑스 출신의 EU 수석 부집행위원장까지 나서 서한을 보낸 것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닌 정치적 개입이라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EDF는 체코에서의 패배를 단순한 실패로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프랑스 정부가 100% 지분을 보유한 EDF는 EU 집행위 내 영향력을 바탕으로 향후 루마니아,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에 동일한 프레임을 적용할 수 있다.

■ 웨스팅하우스, 조용한 카드로 APR1000 압박 지속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는 프랑스처럼 직접적인 정치 공세는 피하고 있지만, 대신 보다 일관되고 구조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다. APR1000이 자사 원천 기술을 무단 도용했다는 주장에 따라 유럽뿐 아니라 글로벌 수주전에서도 지속적으로 ‘IP 분쟁’ 프레임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상 웨스팅하우스는 한국 원전의 유럽 확장을 견제할 가장 오래되고 집요한 경쟁자로 기술적 문제를 정치적 수단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경험과 기반을 갖췄다. 특히 미국 정부와의 유기적 관계는 외교 채널에서도 간접적인 압박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 체코는 시작…루마니아·폴란드도 ‘정치 규제’ 잣대 들이댄다

체코 두코바니 원전 수주는 단순히 2기 건설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이후 발주 예정인 루마니아 체르나보다 원전, 폴란드 신규 원전 사업의 전초전이다. 체코에서의 법적 공방이 장기화되거나 프랑스·미국의 압박이 일정 성과를 거둘 경우 다른 국가들도 같은 방식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팀코리아는 유럽 사업자 인증(ESP)을 취득한 유일한 비유럽 원전 모델인 APR1000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 인증은 수주의 보증수표가 아니다. 국가별 규제 당국과의 실질적인 신뢰, 정권 성향에 따른 외교적 파트너십 구축 없이는 수주 실현 가능성은 낮아진다.

이번 사건은 ‘기술력’이라는 자부심 하나로는 글로벌 수주전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체코 내 계약 보류 사태는 단지 외교 역량 부족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외교부, 산업부, 법무부 등 정부 간 공조 체계 미비, 유럽 규제 프레임에 대한 오판, 현지 정치·법률 리스크에 대한 사전 대응 부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 기술력만으론 부족하다…외교·법률·정치 전략 다시 짜야

한국형 원전은 전 세계적으로 기술적 신뢰도를 입증해왔다. 그러나 지금 유럽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기술의 승부’가 아니라 ‘정치의 게임’이다. 유럽은 에너지 안보, 탈탄소, 일자리 창출, 산업 주권을 모두 고려하는 지역이다. 이 안에서 비유럽 기업은 언제든 ‘규제’라는 명분으로 배제될 수 있다.

체코 수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사례는 단순한 지연을 넘어 한국 원전 수출 전략 전체를 흔들 수 있다. 유럽은 언제든 비유럽 기업에게 탈탄소, 일자리 창출, 산업 주권을 모두 고려헤 ‘규제’라는 명분으로 보이콧을 실행할 수 있다. 이번 교훈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K-원전의 다음 무대는 없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