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하던 윤석열 전 대통령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 전 대통령은 대선 슬로건에서 ‘공정’, ‘상식’, ‘법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출범 이후 공공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를 단행하면서 국회와 충돌을 빚었다. 특히 방송, 연금, 에너지 등 국민 생활에 직결된 핵심 기관까지 예외 없이 ‘정권 코드 맞춤형 인사’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공공기관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훼손하고, 리더십의 공백을 불러와 공공서비스의 질마저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공공기관장 절반 ‘정치 코드’

기업분석 전문기관 리더스인덱스의 집계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임명된 공공기관장 124명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2024년 총선 이후 임기를 시작했고, 이 중 31.5%는 정부와 직·간접적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다. 내부 승진은 드물고 외부 출신, 특히 전직 관료나 정치권 인사가 기관장을 차지하는 일이 다반사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윤 정부에서 낙하산 인사로 비판받은 상임감사의 대다수가 직무수행 관련 전문성 평가에서 낙제점을 받은 것이 드러나 논란이 가중됐다.

에너지 분야는 그중에서도 ‘코드 인사’의 진원지로 지목된다. 원전 확대 기조를 밀어붙이기 위해, 정부는 한수원, 에너지공단, 전력연구원 등 주요 기관의 수장을 잇달아 교체해 정책 방향을 단일화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인사 전략이 ‘정책의 정치화’를 불러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현재 공기업 사장을 맡고 있는 전직 국회의원은 대략 9명다. 이들 9명 중 6명이 에너지 분야 공기업 최고경영자(CEO)로 김동철 한국전력공사 사장은 4선, 정용기 한국지역난방공사 사장과 강기윤 한국남동발전 사장은 재선, 권명호 한국동서발전 사장과 김규환 한국석탄공사 사장은 초선 출신이다.

■ 전직 의원 ‘에너지 낙하산’···탄핵 정국에도 ing

한국가스기술공사 전경 (사진=한국가스기술공사)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시점에서도, 정부는 주요 공공기관장 인사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듯 인사를 밀어붙였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가스공사의 자회사 한국가스기술공사가 신임 사장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관련 경력이 전무한 정치권 인사의 이른바 자질 논란이 불거졌다.

최근 천연가스 등 글로벌 에너지 전환이 가속화하는 흐름에서 가스기술공사는 천연가스 설비 유지·보수, 기술 개발 등을 책임지는 국가 핵심 공기업이다. 특히 전임 사장이 불미스러운 일로 해임된 이후 공석 체제를 이어와 새 사장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직전 사장이자 가스분야 전문가였던 조용돈 전 사장은 재임 기간 해외출장 7회 중 6회에 걸쳐 동거녀를 동반하고, 개인 아파트에 공용 물품을 제공받는 등 과정에서 부당이득 총 1812만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져 임기 만료를 열흘 남긴 지난해 5월 해임됐다. 이후 총선으로 인해 지난해 8월 시작된 사장 인선 절차는 탄핵 정국을 지나 해를 넘기게 됐다.

가스기술공사 임원추천위원회를 통해 신임 사장으로 단독 추천한 이은권 전 국회의원은 대전 중구청장과 제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바 있다. 그는 윤석열 캠프 대전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인물로, 단독 추천으로 사장 자리에 올라 가스기술공사와 관련된 경력은 없다.

■ 국가 에너지 정책, 정치에 잠식 당하지 않아야

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회의에서 장철민 의원이 제시한 사진과 기사 (사진=국회방송 캡쳐)

9일 국회 산업위 현안질의에서 장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관련 사진과 기사 보도를 제시하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전문성도 없고, 대통령 탄핵 후에도 친정권 인사들이 공공기관장을 차지하는 게 공정인가. 국민이 이해하겠느냐”는 일침이 나왔다.

에너지 정책은 단순한 기술 행정이 아니다. 국제 협력과 수십 조 원대 예산이 오가는 고차원적 국가 전략이다. 그런데 에너지 공기업에 정치 인사가 줄줄이 투입되면서, 과학과 데이터 중심 운영이 아니라 정권 유불리에 따른 판단이 우선될 수 있다는 구조적 위험이 제기된다.

윤석열 정부는 공공기관 혁신과 효율화를 강조해왔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고려가 우선된 인사가 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탄핵 정국이라는 비상 상황에서도 임명을 강행한 것은, 이후 정부의 인사권을 제약하려는 의도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에너지 공공기관에서마저 전문성과 독립성이 무너지는 상황에 대해 국회는 물론, 감사원과 국민권익위 등 관련 기관의 철저한 감시가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