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지연, 공사비 상승, 인력난, 탄소 배출, 안전사고까지… 전통 건설 방식의 한계가 뚜렷해지고 있다. 이를 대체할 기술로 공장 제작·현장 조립 방식의 ‘모듈러 건축’이 주목받는다. 시공 속도, 품질, 친환경성에서 앞서며 대형 건설사뿐 아니라 전자·에너지 기업도 잇따라 진출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주도하는 모듈러 산업의 현재와 글로벌 확장 전략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삼성전자가 연초에 미국 CES에서 선보인 ‘홈 AI(Home AI)’ 비전. (사진=삼성전자)
“이제 집도 AI로 통합 관리합니다. 가전을 넘어 모듈러 주택에 진출한 이유.”
국내외 건설 현장에 혁신 바람이 불고 있다. 주인공은 삼성전자와 LG전자다. 이들은 더 이상 단순한 가전 기업이 아니다.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기반의 스마트홈 기술을 무기로, 모듈러 주택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건설사 중심이던 주택 시장에 IT·전자업계가 ‘AI 집’으로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이 변화의 물결은 국내를 넘어 중동, 동남아, 유럽 등 해외 시장까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 “집을 짓는 회사가 바뀐다”…AI 스마트홈이 이끄는 모듈러 혁명
모듈러 주택은 공장에서 미리 제작한 모듈을 현장에서 조립하는 첨단 건축 방식이다. 공기 단축, 인건비 절감, 품질 균일화, 친환경성 등으로 이미 건설업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여기에 AI와 IoT, 에너지 관리, 공조 시스템 등 첨단 기술이 결합되면서 ‘스마트 모듈러 주택’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다.
대한건설정책연구원과 글로벌마켓인사이트(GMI)에 따르면, 국내 모듈러 건축 시장은 2022년 1575억원에서 2023년 8000억원 이상으로 성장했고, 2030년에는 2조원, 글로벌 시장은 2032년 1514억달러(약 204조원)로 확대될 전망이다.
이 거대한 성장 가능성에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잇따라 진입했다. AI, IoT, 에너지 관리, 냉난방공조(HVAC) 등 전자업계의 강점이 건설업계와 결합하며, 미래 주거의 새로운 기준이 만들어지고 있다.
■ 삼성, ‘홈 AI’와 스마트싱스 프로로 미래형 주거 선도
삼성전자는 올해 초 CES에서 발표한 ‘홈 AI(Home AI)’ 비전을 모듈러 건축 시장으로 확장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를 위해 국내 최대 모듈러 건축사 유창이앤씨와 협력해 AI 기반 스마트 모듈러주택 상품 개발에 착수했다.
양사는 올해 2월, ‘스마트싱스 프로(SmartThings Pro)’와 AI 가전, 4200여종의 스마트싱스 연동 기기를 유창이앤씨의 모듈러 건축물에 적용하는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스마트싱스 프로’는 AI를 활용한 에너지 통합 관리, 원격 유지·보수, 설비 제어 등 B2B 솔루션이다. 건물 관리의 효율성을 크게 높인다.
삼성전자는 올해 2월6일 모듈러 주택 전문 유창이앤씨와 업무협약(MOU)를 체결하고 AI 스마트 모듈러 건축 개발에 협력하기로 했다.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의 타이니 하우스 모듈러 주택.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의 AI 가전(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사이니지 등), 온도·동작 센서, 스마트 플러그, 조명, 공조 시스템까지 다양한 기기가 하나의 플랫폼에서 통합 관리된다. 입주자와 관리자는 스마트싱스 앱을 통해 모든 기기와 시스템을 한눈에 모니터링할 수 있다.
또한 삼성전자는 지난 2023년 독일 IFA에서 1인 가구용 ‘타이니하우스’와 친환경 ‘넷 제로 홈(Net Zero Home)’ 컨셉을 선보인 데 이어, 올해에는 독일 모듈러 주택사 ‘홈원(Home One)’과 협력해 현지에서 삼성 스마트싱스 기반 모듈러 주택 공급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중동, 동남아, 유럽 등 해외 시장 공략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AI 솔루션과 국내 최대 모듈러 제작사의 기술력이 만나, 고객들이 다양한 모듈러 공간에서 차별화된 AI 경험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며 “일반 주택은 물론 사무공간이나 호텔, 학교 등 산업 공간까지 AI 기반의 새로운 모듈러 공간을 선보이겠다”고 밝혔다.
■ LG, ‘스마트코티지’로 B2B·세컨드하우스 시장 선점
LG전자는 2023년 말부터 ‘스마트코티지’라는 브랜드로 모듈러 주택 시장을 본격 공략 중이다. 스마트코티지는 도시 근교나 지방에 세컨드 하우스를 쉽게 구축할 수 있는 프리미엄 모듈러 주택이다. AI 가전과 냉난방공조(HVAC), 에너지 절감 시스템이 결합된 게 특징이다.
실제로 성과도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SM엔터테인먼트 연수원에 스마트코티지 3개 동을 공급하며 첫 B2B 고객을 확보했다. 내부에는 오브제컬렉션 워시타워 컴팩트, 식기세척기, 인덕션, 광파오븐, 정수기 등 LG전자의 프리미엄 가전이 빌트인으로 적용됐다.
LG전자가 지난 2024년 12월에 강원도 SM엔터테인먼트 연수원에 공급한 스마트코티지 모듈러 주택. (사진=LG전자)
LG전자는 지난 2024년 12월에 강원도 SM엔터테인먼트 연수원에 모듈러 주택 스마트코티지 3개 동을 공급했다. (사진=LG전자)
스마트코티지에는 스마트 도어락, CCTV, 전동 블라인드 등 다양한 IoT 기기가 포함돼 ‘LG 씽큐(ThinQ)’ 앱을 통해 가전과 IoT 기기를 통합 관리할 수 있다. 특히 지붕 부착형 태양광 패널 옵션을 선택하면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어, 친환경 주거 공간을 만들 수 있다.
LG전자는 앞으로 기업이나 단체 등 B2B 거래를 확대하고 세컨드 하우스, 리조트, 공공시설 등 다양한 시장에서 수주를 늘린다는 계획이다.
LG전자 관계자는 “스마트코티지는 가전·공조·에너지 관리까지 모두 통합한 미래형 주거 솔루션”이라며, “글로벌 시장에서도 냉난방공조 기술과 AI 가전 경쟁력을 앞세워 차별화된 모듈러 주택을 선보이겠다”고 밝혔다.
■ 전자업계의 도전, 주거의 ‘공식’을 다시 쓰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모듈러 주택 시장에 진출한 배경엔 단순한 가전 판매를 넘어 ‘집’이라는 플랫폼 전체를 장악하려는 전략이 있다. 매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가전과 공조 시장의 또 다른 활로를 찾은 것이다.
AI와 IoT 기술이 집 전체를 하나의 스마트홈 플랫폼으로 만들면서 가전, 에너지, 공조와 보안 등 모든 시스템을 통합 제어하는 ‘AI 집’이 미래 주거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전자업계는 건설사에 의존하던 스마트홈 플랫폼을 직접 주도해 가전뿐 아니라 서비스와 데이터까지 통합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모듈러 주택은 학교, 병원, 리조트, 공공시설 등 대량 공급이 가능한 B2B 시장에 적합하고, 삼성과 LG는 이미 글로벌 가전과 공조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해외 모듈러 주택 시장에서도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가전 시장에서는 어느정도 성숙기에 들어선 상황에서 ‘집+가전’ 패키지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 셈이다. AI·에너지 관리 등 고부가가치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은 중국 등 저가 가전업체와의 차별화와 친환경, 스마트시티 등 미래 트렌드 대응에도 효과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전자업계의 진출은 국내외 건설·주택 시장에 큰 변화를 예고한다. IT·전자업계가 건설산업의 혁신 주체로 떠오르면서 스마트홈, 스마트시티, 친환경 건축 등 미래형 주거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동시에 건설사와의 협력, 경쟁 구도도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앞으로 건설사는 가전, 공조, 에너지, 보안 등 다양한 분야의 IT, 전자 기업과 협업해 차별화된 주거 상품을 개발하는 시대가 됐다.
업계 관계자는 “IT 기업들의 참여로 기술 혁신과 사용자 경험이 향상되고 이러한 변화는 건설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스마트시티 구현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