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뷰어스=문서영 기자] 여자는, 어떤 삶을 살 때 성공한 삶을 살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대부분 여성의 고민은 여기에서 나온다. 현대를 살아가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해 자신의 일을 해나가던 여성들은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와 경력에서 갈등한다. 그 사이에서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어 결국 자신의 꿈을 내려놓는 이들도 많다.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은 현실에도 아등바등 육아 도우미 등을 구해가며 경력을 이어가려 애쓰는 여성들의 모습 역시 안쓰럽긴 마찬가지다.
사회적으로 성공이란 수식어를 얻게 된 여성 과학자는 여자로서의 이러한 숙명 대신 철저히 자신의 꿈에 매진한다. 결혼과 자식으로 주저앉은 자신의 어머니처럼은 되지 않겠다는 의지로 모든 난관을 헤쳐나간다. ‘랩걸’의 저자이자 여성 과학자인 호프 자런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미국에 자리를 잡은 북유럽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과학자인 아버지 연구실에서 노는 게 가장 행복했고, 자신이 무엇이 되려는지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식물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행위 자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연구실에 있을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하기만 했다는 소녀는 대학생이 되고,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살인적인 노동량의 아르바이트까지 감내해가며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나가려 노력한다.
(사진=책표지)
그러던 중 한 교수의 제안으로 연구실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본격적으로 학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거미, 생쥐가 친구하자고 달려들 것만 같은 허름한 연구실에서의 시작은 좀처럼 여성 과학자에게 성공의 길을 터주려 하지 않는다. 성별도 성도 다르지만 자매보다 가깝고 쌍둥이보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동료가 있다는 것이 그에겐 가장 큰 행운이다. 그러나 그가 걸어가는 길에 양성평등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심찮게 “어떻게 저런 여자가 이런 연구를 하겠어?”라는 말을 들을 정도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을 포기하고 가장 싼 냉동식품을 대량으로 구매해 끼니를 때우고 미국 전역을 자동차로 오가며 연구비를 획득하고 성과를 올리며 결국 성공한 과학자가 된다.
무엇보다 ‘랩걸’은 유시민 작가가 자신의 딸에게 권해주고 싶다며 거론한 책으로 화제가 됐다. ‘알쓸신잡’ 제작진에 따르면 유시민 작가는 줄곧, 자주 이 ‘랩걸’이 참 좋은 책이라 언급했다. 그럴만하다. 호프 자런은 ‘랩걸’에서 담담하게,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자부심은 꽉 찼지만 자만은 없다. 너무도 스스럼없이 솔직하게 자신을 까발리기에 독자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선다. 노숙자 취급을 받고, 눈 폭풍을 뚫고 달리다 죽을 뻔하고, 학과장이 출입을 금지한 임신 상태에서 몰래 실험실에 잠입하는 그의 이야기는 “이런 사람도 있나” 싶을 정도다.
또 한가지 매력은 호프 자런 이야기 사이사이에 나무와 식물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이는 곧 호프 자런의 삶과도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의 거들먹거림이라거나 ‘당신은 모를거야’ 식으로 풀어놓는 지식 자랑은 존재하지 않는 점이 매력이다. 너무 어렵지도 않다. 호프 자런의 삶을 따라가다 책장을 덮고 나면 주변의 나무가 갑자기 특별해보이기까지 한다.
(사진=tvN 방송화면)
무엇보다 호프 자런은 ‘랩걸’을 통해 소녀 시절부터 꿈나무를 거쳐 중견과학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일상을 상세히 전한다. 이는 사회 출발선에 선 취업 준비생을 비롯해 10년 20년 치열하게 달려온 사회인들 모두에게 남다른 감명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호프 자런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매진하는 모습은 취준생들에게 진짜 사랑하는 일을 찾고 매달릴 수 있는 뜨거운 열정을 전한다. 그런가 하면 호프 자런이 목표를 향해 전진하면서도 끊임없이 ‘잘 하는 걸까’ ‘잘 가고 있는 걸까’ 고민하고 고민하는 지점들은 소위 슬럼프에 빠진 이들이나 쳇바퀴 삶에 지친 이들에게 그럼에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선사한다.
호프 자런은 평소 독서량이 어마어마한 과학자로 알려진 만큼 탄탄한 문장력이 책읽기를 더욱 수월하게 한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독자에게 전하는 데 있어 흡인력이 모자란 점은 아쉽다. 호프 자런의 여성으로서, 또 과학자로서의 삶과 성공은 충분히 인상적이고 대단한데 그 고난과 성공의 과정이 자세히 다뤄지지 않은 점은 무척이나 아쉽다. 호프 자런과 함께 그의 삶을 되짚어보다 가장 중요한 클라이맥스를 보지 못한 느낌이다. 열심히 산을 오르다 산 정상에서의 전경을 미처 보지 못한 채 하산한 것 같고, TV 시트콤만 주구장창 보다 끝난, 그런 기분이다. 독자평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읽다 보니 뭘 읽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이들도 있고 “로맨스 소설인 줄 알았다”는 평도 있다.
물론 정반대의 느낌을 받은 이들도 있다. 식물에 대한 사랑이 더욱 커졌다는 이도 있고, 여성으로서 격려를 받았다는 이도 있다. 삶에 지친 시점에서 엄청난 용기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열기를 전해받았다는 독자평도 눈길을 끈다.
이야기 구조는 단조롭고 평이하다. 호프 자런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성공을 거뒀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에겐 다소 심심하게 다가올 수 있다. 유시민 작가 추천으로 이 책을 집었다면 너무 과한 기대는 하지 않길 바란다.
그럼에도 호프 자런의 ‘랩걸’ 마지막장을 덮는 느낌은 무척이나 좋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의 열정이 부럽기도 하고, 함께 달린 것처럼 뿌듯하기까지 하다.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은 덤이다.